[조성기의 反 금병매] (8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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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서문경이 약간 초췌한 모습으로 금련의 집으로 건너왔다. 금련은 서문경의 얼굴을 보자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짐짓 냉정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어찌 된 일로 나를 다 찾아오셨어요?"

"정말 보고 싶었소. 하지만 집안에 일들이 많아 그동안 찾아오지 못했소."

"무슨 일이 그리 많았나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실 때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요."

"아, 그때는 정말 무서웠어요. 내가 신경이 너무 날카로웠던지 헛것을 다 보고. 그리고 기생으로 있다가 첩이 된 탁이저가 얼마 전에 죽어 장례를 치렀소. 아무튼 부인에게는 미안하고 죄송하오. 다시는 부인을 소홀히 하지 않으리다."

탁이저가 죽었다는 말에 금련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난 또 어르신이 몸져 누운 줄 알고 얼마나 염려했다구요."

금련의 두 눈과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들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긴 했지만 몸져 눕지는 않았소. 부인도 몹시 앓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는 좀 나은 것 같아요. 어르신이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기운이 더 나네요."

아직도 상복을 입고 있는 금련의 얼굴이 사뭇 핼쑥해 보였으나 몸 저 깊은 곳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고 있는 듯하였다. 그 힘은 그대로 서문경에게로 전해져 다시금 욕정을 꿈틀거리게 하였다.

"내 사과하는 뜻에서 부인에게 줄 선물을 사 가지고 왔소. 어이, 대안아!"

대안이라고 하는 하인이 바깥에 서 있다가 보퉁이 하나를 들고 달려와 보자기를 풀었다. 거기에 화려한 머리 장식과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금련은 감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금련의 모습을 보자 서문경은 더욱 금련을 안고 싶어졌다. 무대 귀신이 정말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라도 이전의 그 방에서 금련을 안아 보아야만 하였다.

그런데 그 방으로 선뜻 들어설 용기는 아직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술기운을 빌려야만 할 것 같았다.

"어, 술자리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서문경이 탁자에 놓인 주전자와 술잔을 바라보며 의자로 다가와 앉았다.

"부인 어머님이 오셨다 갔구먼요. 어머님이 어찌나 따님을 나에게 부탁하는지."

어느새 따라 들어온 왕노파가 술자리를 정리하며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어머님이 드시던 술이지만 한잔 드시지요."

금련도 자리를 잡고 앉으며 서문경에게 술을 권하였다.

"아니오. 이 좋은 단옷날 새 술로 우리 한잔 합시다. 할멈이 새 술과 안주를 좀 사오시오."

서문경이 은전을 몇 푼 꺼내어 왕노파에게 건네주자 왕노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나갔다. 마침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갑자기 장대비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허허허, 할멈이 흠뻑 젖겠구먼. 꼭 물에 빠진 생쥐 같겠어."

서문경은 왕노파가 비에 젖은 모습을 상상하는지 비식비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렇게 웃음을 흘리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방 안도 사물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컴컴해졌다. 미처 등불도 켜지 않아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서로에게 마치 귀신과도 같은 형용으로 비쳤다.

서문경은 이럴 때 무대 귀신이 다시 나타나면 어쩌나 하고 온몸이 떨려왔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대장부가 이렇게 떨면 어떡해요?"

금련도 떨려왔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서문경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서문경은 한 손으로 금련의 손등을 덮어 쥐고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금련의 손가락들이 서문경의 깊은 곳을 건드렸으나 그곳은 바짝 얼어 아무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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