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용서의 방정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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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랑 중의 사랑은 무엇일까. 뭐니뭐니 해도 부모의 자식 사랑이다. 아무리 혼을 내도 사랑이요, 매를 들어도 사랑이다. 그 요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용서일 것이다.

용서가 자리하는 한 미움이나 증오가 끼어들 틈이 없다. 부모는 왜 자식을 용서할까. 다름아닌 핏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이 아니고 또 다른 나라고 여기는 거다. 내 몸보다 더 아픈 게 자식의 아픔이다. 그게 부모다. 그래서 혼나는 자식보다 혼내는 부모의 마음이 더 쓰린 거다. 세상 어느 부모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권력과 국민.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이 키워주고 보살피는 가운데 권력은 성장한다. 어느 권력도 예외일 수 없다. 훌륭한 권력은 대권도 거머쥔다. 결국 권력은 자식이요, 국민은 부모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왜. 도대체 왜. 권력과 국민 사이엔 사랑이 없을까를 생각해 본다. 왜 용서가 없는지를 생각해본다. 유독 우리가 더 그런지를 생각해본다. 이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해본다.

김대중 정권. 그 정권은 건강하지 못했다. 부패한 정권이란 오명을 썼다. 대통령의 아들 둘이 구속됐다. 최측근도 구속됐다. 이른바 실세란 사람들은 갖가지 스캔들에 연루돼 있다.

그 정권은 공정하지도 않았다. 편을 가른다는 인상을 주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결과가 그랬다. 호남 일색이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치박탈을 당했다. 지역감정이 악화되는 계기도 됐다.

그 정권은 투명하지 않았다. 몰래 북한에 돈을 건네주었다. 대북 송금이 그것이다. 대가로 무엇을 얻었든 못 얻었든 국민을 속였다. 어찌됐든 친구와도 멀어졌다. 한.미 우호관계의 균열을 가져왔다.

결국 실패한 정권이란 소리까지 듣고 있다. 물론 잘한 일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나열하진 않겠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 같은 논쟁은 이미 있을 만큼 있었다. 그것으로 초점을 흐릴 필요가 없다. 김대중 정권의 잘잘못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 모두 한번 생각해 보자는 거다.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보듯 김대중 정권을 보자는 얘기다. 김대중 정권은 분명 우리 국민이 만들어준 정권이다. 때문에 싫든 좋든 우리 국민의 자식이다. 그 정권이 실패한 정권이라 여긴다면 실패한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입장이 돼 보자. 매를 들 순 있다. 그러나 마음은 더 애처롭지 않은가.

미국의 예를 보자.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을 때다. 르윈스키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의 미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이랬다. '그가 잘못을 시인한 이상 사임을 원치 않는다'. 75%가 그렇게 답했다.

그렇다고 자연인 클린턴을 용서한 건 아니었다. 62%는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그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미국민은 대통령 클린턴을 용서했을 뿐이다.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권력이기에 그 권력을 용서했던 거다.

거기에 덧붙여 클린턴의 고백이 있었기에 그 용서는 가능했다. 어느 부모치고 잘못을 시인하는 자식을 내쫓겠는가. 용서의 방정식이다. 회개 없는 용서란 없다. 고백없는 회개란 없다.

김대중 정권도 고백이 있어야 한다. 대북 송금의 진상을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를 하는 거다. 그래야 국민도 부모의 입장에서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고백이 늦어진다 해도 매부터 들진 말자. 인내하는 마음이 곧 부모의 마음 아닐까.

이연홍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