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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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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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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병신년(丙申年) 첫날이다. ‘붉은 원숭이해’의 빨간 햇살이 2016년 들머리를 물들였다. 원숭이 하면 떠오르는 구전동요가 있다. ‘원숭이 엉덩이(똥구멍)는 빨개’다. 어릴 적 심심찮게 불렀다. 여자애들은 노래에 맞춰 고무줄놀이도 했다. 원숭이 엉덩이는 왜 빨갈까. 어경연 서울대공원 종보전연구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원숭이가 그렇진 않아요. 암컷만 발정기 때 2주 정도 빨갛게 부풀어 오릅니다. 수컷을 유혹하는 거죠. 침팬지도 엉덩이가 붉어지지만 고릴라·오랑우탄은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원숭이는 한국에 살지 않았다. 예로부터 ‘동국무원(東國無猿)’이라 했다. 동요 ‘원숭이 엉덩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정확한 학설은 없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1909년 일제(日帝)가 창경궁을 창경원 동물원으로 격하시키면서 일본원숭이가 들어왔고, 이를 구경한 조선 사람들이 노래를 만들게 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동요는 말잇기 놀이를 닮았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무심코 따라 했던 노래지만 여기엔 무시 못할 생각거리가 들어 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우리 현대사의 그늘을 주목했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투옥됐던 그는 당시 법정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그에게 덮어씌운 억지 주장 앞에서 이 노래가 떠올랐다고 했다. 원숭이부터 백두산까지, 뭐든 갖다 붙이는 폭력적 논리로 한 개인을 단죄시켰던 한국사회를 돌아봤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졌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원숭이 엉덩이’에서 새 세상을 열어갈 키워드를 찾는다. 디지털 영상시대, 이 노래처럼 사유와 이미지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상력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연상력을 옹호한다. 2016년 우리의 선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전 우리 부모 세대는 ‘원숭이 엉덩이’ 바로 다음에 ‘대한의 노래’를 이어 불렀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중략)/ 복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새해 첫날 ‘원숭이 엉덩이’가 복된 대한민국을 만들어 보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물론 나의 비약일 수 있다. 그럼에도 120여 년 전의 구전민요가 무겁게만 다가온다.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거리다, 병신(丙申)이 되면 못 가리.’ 1896년 병신년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 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