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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없는 법안 거래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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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미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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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미
정치국제부문 기자

8일 오전 10시20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회의실. 전체회의가 시작될 무렵 의원들의 책상마다 법안 설명 자료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9일 본회의를 앞두고 법안 246건이 상정될 예정이었다. 12시간 꼬박 회의가 열린다고 해도 3분당 1건을 심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이상민 위원장이 국토교통위원회에서 넘어온 37건의 법안을 상정하기 위해 법안 이름을 부르는 데만 5분 가까이 걸렸다. 오전 2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상정된 법안은 47건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회의는 개의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중단됐다. 최근 국회에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법안 연계 처리’ 문제 때문이었다. 지난 3월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의 원내지도부는 여당이 주장하는 관광진흥법과 야당이 원하는 최저임금법·고용보험법을 맞바꿔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야당이 원한 2개 법안과 묶였던 관광진흥법은 지난 2일 본회의에서 예산안 등과 연계돼 이미 통과됐다. 야당은 당연히 2개 법안 처리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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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야당 간사인 새정치연합 전해철 의원은 “(여당이 요구한) 관광진흥법이 통과됐으니 최저임금법과 고용보험법은 약속했던 대로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저임금법안은 일부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생활임금제’의 근거법인데 여당은 사실상 국가와 지자체에 적정임금 보장을 강제하는 조항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처리를 꺼리고 있다. 고용보험법안은 실업자도 국민연금 가입이 가능하도록 보험료의 일부를 지원하는 법이다. 야당은 “지난 3월 합의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2개 법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새누리당은 “관광진흥법은 이미 처리됐으니 사정 변경이 생긴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막아서는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오전 회의는 20분간 멈췄다. 오후 1시부터는 5시간 동안 열리지 않았다.

 여야가 힘겨루기만 할 뿐 논의에 진척이 없자 오후 한때 이상민 위원장과 새누리당 이한성 간사만 회의장에 나타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사법시험 존치와 관련한 현안질의를 받기 위해 나온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회의장 앞에서 대기했다. 법안 심의를 기다리는 부처 공무원들은 하릴없이 복도를 어슬렁댔다. 결국 법사위는 오후 6시에 속개했고 3시간 동안 무더기로 법안을 심사했다. 이날 다른 상임위서 넘어온 172건을 포함해 가까스로 246건을 모두 다뤘다.

 법사위에는 각 상임위의 ‘벼락치기’로 1338건(3일 기준)의 법안이 쌓여 있다. 그런데도 정기국회 폐회 하루 전까지 파행을 거듭했다. 무원칙한 법안 거래가 초래한 예견된 뒤탈이었다.

글=박유미 정치국제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