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개혁 법안 지연, 국회와 대통령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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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근혜 대통령이 8일 국무회의에서 “국회가 온통 선거에나 신경을 쓰고, 기득권 집단의 대리인이 돼 청년들의 희망을 볼모로 잡고 있다”며 “누구를 위한 국회인가”라고 맹비난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10일과 24일에도 ‘립서비스’ ‘위선’ 등의 표현을 써 가며 국회를 비난한 바 있다. 대통령이 한 달도 안 돼 세 차례나 극단적 용어를 동원해 국회를 질책한 것이다. 올해 안에 핵심 법안들이 처리되지 못하면 내년 총선에서 국회심판론으로 야당을 맹공하겠다는 경고로도 풀이된다.

 박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나라가 부도났던 1997년 상황과 흡사하다. 수출 실적이 급속히 쪼그라들어 1억 달러 이상을 수출한 기업이 지난해 95개에서 올해 59개로 38%나 감소했다. 청년실업은 갈수록 늘고 가계부채는 1100조원을 넘어섰다. 여기에 중국의 불황, 미국의 금리 인상까지 예정돼 있어 경제의 주름은 날로 깊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런 국가적 위기를 외면한 채 당권과 공천 지분 다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여야는 9일 종료되는 정기국회 중 경제활성화 2개 법안을 처리하고, 5대 노동개혁 법안은 10일부터 열릴 임시국회에서 처리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들 법안은 새정치민주연합의 반대로 8일까지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다. 전체 근로자의 10%도 안 되는 귀족노조의 볼모가 된 당내 강경파가 합의를 휴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내홍에 휩싸인 야당의 집안 사정까지 감안하면 이들 법안은 임시국회 중에 처리되지 못하고, 내년 4·13 총선까지 논의가 올스톱될 공산이 크다. 그 피해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시름하는 청년들을 비롯해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국회가 박 대통령에게 욕먹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그렇지 않아도 19대 국회는 ‘최악의 직무 유기 국회’로 찍힌 지 오래다. 이번 국회에서 장기 계류된 끝에 자동 폐기된 법안은 1만1000건에 달한다. 그동안 1위였던 18대 6301건을 크게 앞지르는 부끄러운 기록이다. 여야는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기 전에 전력 질주해야 한다. 합의대로 경제 살리기 2개 법안은 9일 중에, 노동개혁 5대 법안은 내년 1월 8일까지 예정된 임시국회 안에 반드시 통과시키기 바란다.

 법안 논의가 지지부진한 데는 청와대의 책임도 없지 않다. 박 대통령은 노동개혁 논의가 본격화할 시점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여 야당의 국회 보이콧을 자초했다. 그럼에도 야당과의 대화는 기피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 야당 지도부와 자주 만나 소통했다”고 했지만 “올해만 2번”이라는 설명은 야당과의 대화가 얼마나 빈약했는지 드러냈을 뿐이다. 대통령이 야당과 만나기를 꺼리고, 노동개혁의 핵심인 노조와 불통하면 상황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박 대통령은 국회를 압박하기 앞서 야당과 노조 대표를 만나 경청하고, 설득하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