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동사인 듯 동사 아닌 명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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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4조원대 다단계 사기범인 조희팔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이번엔 풀릴까? 밀항지 중국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뒤에도 그에 대한 목격담은 계속되고 있다. 조희팔의 죽음을 증거하는 자료로 제시된 장례식 동영상과 사망진단서도 조작됐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상태다.

 어떤 일을 입증하다는 의미로 ‘증거하다’는 말을 쓸 때가 있다. “조희팔의 죽음을 증거하는 자료”는 “조희팔의 죽음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다. ‘증거’는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이르는 명사다. 여기에 ‘-하다’를 붙여 동사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증거를 내세워 증명할 때는 ‘입증하다’를 쓰면 된다.

 접사 ‘-하다’는 곧잘 마술을 부린다. 일부 명사나 부사 등을 동사나 형용사로 바꿔 주는 전성(轉成) 기능이 있다. 문제는 모든 낱말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책하다’ ‘성적하다’와 같은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책’이나 ‘성적’은 ‘독서’나 ‘공부’와 비교해 움직임이 없다. ‘-하다’는 ‘독서하다’ ‘공부하다’처럼 대체로 동작성이 있는 말에 붙는다.

 동작성이 없거나 사건·사태·과정·정신작용을 뜻하지 않는 명사는 대개 ‘-하다’를 붙이지 않는다. 논란의 여지는 있다. 언어 습관의 변화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국립국어원은 ‘기초하다’ ‘근거하다’ ‘토대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린 반면 ‘바탕하다’ ‘기반하다’ ‘뿌리하다’ 등은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다. 결국 사전을 부지런히 찾아보거나 예외적인 말들을 기억해 두는 수밖에 없다.

 “실화에 바탕한 단편영화”의 경우 “실화에 바탕을 둔 단편영화”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단편영화”로 바꾸는 게 적절하다. ‘바탕하다’란 동사는 없다.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의견”도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을 둔 의견”으로 고쳐야 한다. 아예 “객관적인 사실을 담은 의견” 등으로 적절히 바꿔 써도 된다. “농민과 농촌에 뿌리한 금융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농민과 농촌에 뿌리를 둔 금융사”라고 표현해야 어색하지 않다.

이은희 기자 e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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