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의 인권변호사, 인종주의자로 타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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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 55년 만에 속편 『파수꾼』을 출간한다. [사진 열린책들]

14일 전세계에서 동시에 출간되는 미국의 여성 작가 하퍼 리(89)의 두 번째 장편소설 『파수꾼(Go Set a Watchman)』(열린책들)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에게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안긴 전작 『앵무새 죽이기』에서 흑인 범죄피의자 변호를 자청했던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쿠클럭스클랜) 회합에도 참가하는 인종주의자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1960년에 출간된 『앵무새 죽이기』는 대공황이 한창인 1930년대 앨라배마주의 가상 도시 메이콤이 배경이다. 『파수꾼』은 시간 배경만 50년대로 바뀌었을 뿐 같은 장소에 같은 인물들이 나온다. 젊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이상을 쫓던 변호사가 나이 들어 미국 남부 특유의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그런 변화를 ‘폭발적인 반전 플롯’이라고 표현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신작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인종 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너는 깜둥이(Negroes)들이 떼지어 우리 학교와 교회, 극장에 출몰하길 바라니? 그들이 꼭 우리 세상에 있어야겠어?”

『앵무새 죽이기』(左), 『파수꾼』(右)

 뉴욕에서 생활하다 고향을 방문한 20대의 딸 스카웃(진 루이스 핀치)에게 한 말이다.

 그런 모습은 스카웃이 여섯 살로 나오는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애티커스는 어린 딸에게 자신이 흑인 피의자를 변호한 이유에 대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상적인 아버지, 원칙을 고수하는 이상주의자, 정의와 공평함을 신봉하는 깨인 사람…. 애티커스는 미국 사회에서 도덕적 온전함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했고, 그의 이름을 따 아이 이름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애티커스 같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을 가는 학생들이 생길 정도였다.

 지금까지 『앵무새 죽이기』의 전세계 판매 부수는 4000만 부. 출간 이듬해 퓰리처상 수상작에 선정됐고, 62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배우 그레고리 펙(2003년 사망)이 애티커스 역을 맡았다.

 국내에서도 2003년 정식 판권 계약을 맺은 이후에만 30만 부 가량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신작 『파수꾼』의 판권을 두고 출판사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 결국 열린책들이 따냈고, 초판만 10만 부를 찍는다.

 전작과 판이하게 다른 신작에 대해 평단과 독자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뉴욕타임스는 엇갈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앵무새 죽이기』를 재미 있게 읽은 독자들은 새 소설을 읽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많다고 한다. 평생 롤모델로 삼았던 애티커스의 타락에 실망했다는 얘기다.

 『앵무새 죽이기』가 ‘당의정 소설’이었던 반면 신작은 오히려 ‘몸에 좋은 쓴 약’이라는 분석도 있다. 전작이 이상을 추구하는 백인 변호사를 부각시켜 정작 심각한 인종 갈등에 눈 감았다면 신작은 이상주의자가 결국 인종주의자로 전락하고 마는 설정을 통해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애티커스가 『앵무새 죽이기』에서 성자처럼 그려지지 않았더라면 소설이 훨씬 풍성하고 훌륭했으리라는 추측, 도덕적 확실성이 명백하면 위대한 소설이 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하퍼 리가 57년 소설을 완성했으나 출판사 편집자가 스카웃의 어린 시절을 써보라는 권유해 『앵무새 죽이기』를 썼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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