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줄 사람 없는 노인들 … 마지막 순간 기록해주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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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김광안씨가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의 주차장 관리건물 계단에서 한 노인의 영정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건설사 임원 출신인 김씨는 지난해 부터 노인 760명의 영정사진을 무료로 찍어줬다. [신인섭 기자]
김씨가 종묘광장공원 에 설치한 파라솔은 영정사진을 찍으려는 노인들로 북적인다. [사진 김광안씨]

‘영정사진 무료로 찍어드립니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 매일 2500여 명의 노인이 찾는 공원 한쪽에 설치된 파란색 파라솔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김광안(78)씨와 부인 박영자(74)씨가 공원 주차관리건물의 계단으로 노인들을 안내했다. 좁은 낚시 의자와 삼각대에 고정시킨 사진기 한 대, 건물 계단의 울퉁불퉁한 회색 콘크리트 벽을 배경으로 1평 남짓한 간이 스튜디오가 차려졌다.

 “김 선생. 영정사진 찍으러 왔어요. 마지막 졸업사진인데 잘 좀 부탁합니다.”

 이날 첫 손님인 안상보(79)씨가 의자에 앉았다. 셔터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안씨는 머리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질까 빗을 꺼내 들고 연신 빗질을 했다. 노인 5명의 영정사진을 연달아 찍고 잠시 숨을 돌린 김씨가 기자에게 사진기를 보여줬다. “뷰파인더로 본 노인들의 얼굴은 그분들 인생처럼 제각각입니다. 아쉬운 표정, 슬픈 표정, 활짝 웃는 표정까지….”

 김씨가 무료로 영정사진을 촬영해주고 있는 건 지난해 9월부터다. 지금까지 760명의 노인들이 가로 27㎝, 세로 35㎝의 액자에 담긴 영정사진을 받아 갔다. 1965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건설업계에 들어간 김씨는 대림산업의 중동 지점장(지사장)을 거쳐 본사 이사직을 마치고 20여 년 전 은퇴했다. 젊은 시절 세계 각지를 누빈 김씨에게 낡은 사진기 한 대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낙이었다.

 “오랫동안 임원 명함을 주머니에 한가득 넣어 두고 살았어요. 그저 취미로 사진을 찍곤 했죠. 그런데 지난해 거울을 보니 얼굴 여기저기에 주름이 많이 생기고 머리도 하얗게 세었더군요. 어느덧 제가 노인이 된 거죠. 기분이 묘합디다.”

 김씨는 은퇴 후 잠시 잊고 있던 카메라를 창고에서 꺼내 들고 종묘광장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김씨와 엇비슷한 나이인 이들의 세상이었다.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부터 벤치 한구석에서 조용히 한숨짓는 사람, 옹기종기 모여 장기를 두며 인생의 외로움을 달래는 이들까지. 김씨는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이자 우리나라를 키워낸 그들이 공원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독거노인 인구가 137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병마에 시달리는 노인들, 그렇다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이들이 넘쳐나는 겁니다. 사회와 가정에서 밀려난 그들의 마지막을 기록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영정사진을 무료로 찍어주기로 결정했지요.”

 처음엔 “재수 없게 무슨 영정사진이냐”고 노발대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김씨의 작은 스튜디오는 어느덧 공원의 명물이 됐다. “평생을 힘들게 일해 놓고 또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타박하던 부인 박씨는 이젠 남편보다 먼저 장비를 챙겨 집을 나선다.

 어느덧 마지막 촬영 순서. 영정사진을 찍고 나온 차모(86)씨의 눈가가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차씨는 무더운 날에도 새 옷을 꺼내 입고 머리도 말끔하게 다듬었다.

 “사실 영정 찍을 생각도 안 했어요. 한때는 세상을 등질까 하는, 나쁜 생각도 했지요. 내가 죽어도 장례 치러줄 가족도 없고…. 누군들 내 삶을 기억해 주겠소. 그래도 김 선생을 보고, 내 마지막을 멋진 모습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김씨는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겠다고 결심하는 날까지 카메라를 놓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는 이 공원을 퇴적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강 하구에 삼각주처럼 쌓여 가는 모래섬처럼 가정과 사회에서 밀려난 노인들이 모여드는 공간이란 거지요. 저는 세상에서 밀려나 삶의 마지막 길목에 와 있는 그분들의 손을 잠시 붙잡아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1000명이고 2000명이고 힘 닿는 데까지 사진을 찍어드릴 겁니다.”

글=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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