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언론 "日王 처음으로 과거史 언급 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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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明人)일왕이 6일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을 초청, 왕궁에서 주최한 만찬에서 두 사람 모두 '과거사'문제를 언급하지 않아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양국 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던 일제 침략역사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왕은 이날 환영식사에서 역사 문제에 대해 "양국민이 걸어온 역사에 대해 늘 진실을 찾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라고 언급했다. 盧대통령도 "1천5백년에 걸친 교류.친선의 역사"라고 말했다.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 이후 한국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은 이번이 다섯번째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역사문제가 주요 관심사였다.

일왕은 1998년 김대중(金大中)전 대통령의 방일 때는 "한때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많은 아픔을 준 적이 있다. 그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때 처음으로 역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는 일왕과 盧대통령의 공식 발언에서 모두 빠졌다. NHK방송은 "전후 세대 첫 한국 대통령이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평가했다.

일본 보수세력들은 한발짝 더 나가 일본 측이 한.일 최고위급 만남에서 더 이상 '사과성 발언'을 하지 않게 됐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일본의 상징적 대표인 일왕의 공식 발언에서 사라짐에 따라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이 6일 인터넷판에서 "오늘 밤 만찬에서 천황폐하가 처음으로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크게 보도한 것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외무성에선 "사과 표현이 빠졌다고 해서 역사에 대한 반성과 아픔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란 표현 속에 들어가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일왕의 발언이 '진실 찾기'로 바뀜에 따라 우익 세력들이 이를 악용해 일제 침략 역사를 미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2001년 이후만 해도 역사왜곡 교과서.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이 있었고, 최근에는 아소다로(麻生太郞)자민당 정조회장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먼저 원했다"고 발언하는 등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너무 빨리 '양보'해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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