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를 받던 폐암 환자, 메르스 이겨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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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암치료를 받던 폐암 환자가 메르스를 이겨냈다.

주인공은 96번 환자(42ㆍ여)다. 이 달 8일 메르스 확진을 받았던 그는 19일만인 지난 27일 완치돼 퇴원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과거 암수술을 받았던 환자가 메르스에서 완치된 적은 있으나 투병 중인 암환자는 처음이다.

96번 환자는 2011년과 2013년 간암 등으로 두 차례 암 수술을 받았다. 올 5월에는 폐암이 발견돼 병원을 오가며 항암 치료를 받았다. 그러던 중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해 메르스에 걸려 강릉의료원 음압병실로 옮겨졌고, 간호사가 메르스에 걸려 강릉의료원이 부분 폐쇄된 지난 26일 강원대병원으로 다시 옮겼다가 이튿날 퇴원했다.

그는 28일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 “처음엔 살아서 병실 문을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서워 며칠 동안 울기만 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힘을 준 건 고교 3학년 딸과 의료진이었다. 격리된 첫날 그는 딸과 통화했다. 딸에게 건넨 첫마디가 “엄마 죽을 것 같아. 너무 무서워”였다. 그런 엄마에게 딸이 호통치듯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엄마. 일흔 넘는 할머니도 이겨냈다잖아.”

96번 환자는 “어린 딸이 얼마나 무서웠겠느냐”며 “그런데도 다부지게 나오는 모습에서 나 스스로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쉽지 않았다. 96번 환자는 “약해진 폐를 메르스 바이러스가 공격한다고 하니 정말 끔찍했다”며 “처음 며칠 간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의료진은 그를 돌보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암 환자여서 독한 약을 쓰기 어렵다는 게 고민이었다. 여러차례 회의 끝에 다른 환자의 절반만 약을 줬다. 96번 환자는 “의료진이 그런 사정을 상세히 설명해주니 오히려 믿음이 갔다”며 “그때부터 의료진을 믿고 따르면 나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딸은 매일 문자로 안부를 물으며 엄마를 응원했다. 의료진은 곁에서 늘 “괜찮아 질 거다”라고 다독였다. 며칠이 지나 38도까지 오르던 열이 내렸고,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결국 96번 환자는 완치돼 퇴원했다. 그는 “병원에 있으면서 가족들과 웃고 떠들며 족발을 먹던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며 “가족과 족발 파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원대병원 김우진 호흡기전문질환센터장은 “몸에 위험 요인이 있더라고 치료를 잘 받으면 메르스를 이길 수 있다는 걸 96번 환자가 보여줬다”고 말했다.

강릉=박진호 기자, 정종훈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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