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5)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28) 청전 이상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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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청전 이상범과 심산 노수현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이 지도하는 서화미술회의 제3회졸업생이었다. 묵경보다 2년 후배이고, 이당보다 1년후배가 된다. 심전은 두제자를 몹시 사랑해서 심전이 작고한 1919년까지 당주동에 있는 심전의 화실 경고헌에서 자고 먹으면서 그림공부를 하게하였다. 그러므로 청전과 심산은 오랫동안 동문수학한사이로 매우 가까운터이었다.
두사람은 심전이 예언한대로 만년에 이르러 산수화가로 대성해 청전·심산시대라고 일컬어질 만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두사람의 그림값도 놀랍게 비싸져 스승인 심전·소림을 능가할 정도이었다.
청전은 1897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는데 난지 6개월만에 아버지가 작고하여 집안살림이 갑자기 기울어졌다.
가난속에서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청전과 두형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청전은 종로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비때문에 중퇴하고 그림재주가 있어 17세때 서화미술회에 들어와 심전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경묵헌에서 숙식하고있었는데 청전은 그림이 스승인 심전과 똑 같다고해 심전한테 그림 주문이 많아 채 그릴수가 없을때만 청전이 대신 그리고 화제만 심전이 썼다. 심전이작고한 뒤에도 생전에 못 그려준 그림빚을 갚기위해 청전이 그림을 그리고 석정 안종원이 화제를 써 준일이 많았다. 심전이 살았을때 경묵헌에 위창 오세창과 석정 안종원이 자주 들렀으므로 글씨가 심전과 흡사한 안종원이 화제를 써 생전에 그려둔것 처럼 화채를 갚은것이었다.
심전이 청전의 아호를 지어줄때에 『청년심전』 즉, 젊은 심전이란 뜻으로 지어준 것이다.이만큼 청전은 심전의 신임과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심전이 작고한뒤에 청전은 경묵헌을 나와 옥인동에 있는 형들과 어머니가 살고있는 집으로돌아왔다. 그 옆집에 행인 이승만이 살고있었는데 청전의 형 둘은 측량기사로 경성부청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여름 장마때 두집 사이에 있는 흙담이 무너졌는데 다시 쌓아올리기도 성가셔서 그냥 터놓고 두집이 한집같이 지내게 되었다고한다.
이때부터 동양화가 이상범과 서양화가 이승만이 사귀게 되어 50년동안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되었다.
아들형제들도 술친구로 친해졌지만 두집 어머니는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가을철이면 두마나님이 자하문 밖으로 고춧잎을 따러 나갔다. 저녁때 두마나님이 고춧잎을 잔뜩 따가지고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데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므로 청전이 어머니 마중을 나갔다. 막내동이 청전은 효성이 지극했다.
이날도 형들은 집에 있고, 청전혼자서만 걱정이 되어 나왔는데 두집 어머니를 발견하자 먼저 행인어머님의 짐을 받아내렸다. 다음에 자기어머님의 짐을 받아내리려고 하니까 기운이 행인어머님보다 센 청전어머님은 괜찮다고 한사코 그냥 머리에 이고 걸어왔다. 청전은 할수없이 행인어머님의 짐만 걸머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행인어머님은 집에 돌아와 행인형제한테 섭섭한 이야기를 해 행인형제가 몹시 난처했다고 한다. 청전은 이만큼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청전의 둘째형은 측량을 하러 각처 산으로 돌아다니다가 금광을 발견해 큰돈을 벌게되었다. 그돈으로 아우의 화실을 지어 주었다. 「청연산방」이라는 청전의 화실은 이렇게해서 된것으로 청전은 죽을때 유언으로 「청연산방」을 영구보존해달라고 하였다. 「청연산방」에서 청전의 모든 걸작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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