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림의 '굿모닝 레터'] 여름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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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저녁을 먹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달렸습니다. 벚나무에 붉고 까만 열매가 달린 걸 눈여겨 봤어요. 이것이 버찌라는 걸 처음 안 듯이 놀랐습니다. 멀지 않은 데서 우는 뻐꾸기 소리에 가슴이 숙연해졌습니다. 인생은 아주 진지한 거라고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개망초꽃, 찔레꽃에 앉은 벌과 나비를 사진 찍었습니다. 벤치에 앉은 연인들이 애정을 피부로 느껴가는 몸짓이 보이더군요. "우리는 살아가야만 하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듯 사랑해야만 하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 스쳐갔습니다. 행인들의 여름 셔츠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비쳤습니다. 그 많은 상처 속에서도 끝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건 인간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겠죠. 인생의 둘도 없는 활력이 되어 사랑할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기분에 떨기 때문이죠.

바람에 날려가듯 그것도 허망하게 느껴지지만, 사람이 사랑할 때 눈빛이 비로소 투명해진다 생각하니, 사무치게 갖고 싶은 거예요. 살랑살랑 귓가에 물결치는 머리칼처럼 기분 좋은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세요. 사랑의 말엔 혼이 깃드니까요.

신현림 <시인.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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