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아날로그의 미학이 그립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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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27면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서울 혜화동의 카톨릭대학교 신학부였다. 신부가 되고자 인간사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놓기로 결단을 내린 후였다. 뜻을 같이 한 새내기 동료들과의 만남은 전통과 새로움, 질서와 자유의 오묘한 조화와 긴장 속에서 이뤄졌다. 선배들이 공부하고 수행한 흔적이 배어 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가능한 한 새로움과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사소했지만 소중한 추억들은 아직도 기억의 창고에서 생생하다. 우리는 축제에서 선배들이 하지 않은 맥주·커피를 마실 수 있는 쉼터를 운영했고, 그리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영어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진 3학년 말, H가 부모님을 따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도 신부가 되는 길을 계속 걸었지만 편지를 주고받을 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특별히 가까웠던 그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4학년을 마치고는 D가 부모·형제·자매 모두와 미국 워싱턴으로 이민을 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보다 가깝다지만 아득히 먼 곳이다. D에 대한 그리움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군복무를 마친 내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적응 과정을 거쳐 공부에 몰두하는 중엔 Y가 로마로 유학을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서울 혜화동에서 만난 우리는 이렇게 하여 먼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고 간간히 주고받는 편지로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생겼다. 지인의 초청으로 비엔나에서 워싱턴에 가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D를 만나야 했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시던 D 어머님의 사랑에 감동하면서, 불과 이틀이었지만 우리는 길고 긴 정담을 나눴다. 로마에도 회의 차 가게 되어 Y를 만났다. 얼마 후엔 H도, D도 로마로 유학을 하면서 Y와 여러 해를 함께 공부하게 됐다. 귀국하여 학교에서 일하던 나는 여름이면 자료 수집을 위해 비엔나로 나갔고, 이어 로마까지 가서 이들을 만났다. 쉽지 않은 만남을 열심히 이어가면서 우리는 매번 가슴 뛰며 반가워했다.

지금 우리는 다시 흩어졌다. 워싱턴·부에노스아이레스·서울·대구. 여전히 아득히 먼 거리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진다. 계절과 낮밤이 정반대인 부에노스아이레스와도 시간을 맞춰 통화를 한다. 카톡을 통해 문자와 자료들을 주거니 받거니 할 수도 있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친구의 또 다른 친구 소식까지 알 수 있다. 이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횟수도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통화도 문자도 만남조차 시들해지고 그리움도 희미해지는 것 같다. 가까이 있는 친구들과 다름 없는 일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만남을 앞둔 설레임과 만남의 기쁨은 어디로 간 걸까. 기술의 편리가 우리의 삶을 단조롭게 만드는 것만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 아날로그의 미학을 찾게 된달까. 사무치던 그리움, 간절하고도 애틋한 마음…. 기다림이 쉽게 해소되는 시대를 사는 이의 배부른 투정인 걸 알면서도 아쉬움을 어쩔 수가 없다.



전헌호 서울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석·박사 학위(신학)를 받았다. 현재 인간과 영성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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