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입법부, 베이징에 반기 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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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산시위’를 촉발했던 홍콩 행정장관 선거안이 18일 입법원 표결에서 부결됐다. 범민주파 시위대가 부결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AP=뉴시스]

중국 당국의 지침에 따라 작성된 홍콩 행정장관 선거방안이 홍콩 입법회(국회)에서 부결됐다. 지난해 79일간 계속된 ‘우산혁명’ 시위의 도화선이 됐던 바로 그 방안이다. 홍콩 입법회가 중국 당국에 반기를 들면서 2017년 행정장관 선거는 현행방식대로 간접선거로 치러지게 됐다. 하지만 홍콩의 친(親)중국 세력과 반(反)중국 세력간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홍콩 입법회는 18일 참석 의원 37명을 대상으로 행정장관 선거안을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찬성 8표, 반대 28표, 기권 1표로 찬성표가 가결 요건인 3분의 2에 훨씬 못미쳤다. 이날 표결에선 홍콩의 자치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범민주파 27명 이외에 의료계 대표 의원인 량자류(梁家<9A2E>)가 반대표를 던졌다.

 이번 법안은 형식적으로는 홍콩 정부가 작성해 제출한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지난해 8월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가 마련한 내용을 토대로 했다. 현재 간접선거로 치러지고 있는 행정장관 선거를 2017년부터 직접선거로 전환하되, 1200명으로 구성되는 후보추천위원회에서 과반의 지지를 받는 후보자 2∼3명을 대상으로 선거를 치른다는 게 핵심내용이다.

중국 당국은 홍콩에서 사상 처음으로 18세 이상 주민에게 1인 1표 방식의 보통선거권을 부여하는 획기적 방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홍콩 대학생과 야권은 이에 거세게 반발했다. 후보추천위원회의 사전 추천을 거치게 함으로써 반중국 성향 인사들의 출마자격이 원천 봉쇄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시작된 대규모 도심 점거 시위 일명 ‘우산시위’가 79일간 계속됐다.

 법안 부결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그동안 홍콩 정부는 선거안이 부결될 경우 당분간 직선제 방안 등 정치개혁안을 마련하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이에 따라 법안을 지지해 온 세력들은 500만 홍콩 유권자가 직접선거의 권리를 누릴 기회를 놓치게 됐다며 범민주파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친중국파인 민건련(民建聯)의 탄야오쭝(譚耀宗) 의원은 “홍콩이 보통선거를 치르지 못하는 것은 범민주파 책임”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의 중국 공산당과 정부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자매지격인 환구시보는 즉각 인터넷판에 논평을 싣고 “홍콩이 금융의 도시, 패션의 도시에서 세계의 ‘혼란의 도시(亂都)’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반면 범민주파와 반중국 세력은 진정한 보통선거가 보장되는 새로운 정치개혁 방안을 마련하라고 홍콩과 중국 당국에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선거안 부결 직후 범민주파 의원들은 입법회 청사에서 “진정한 보통선거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지난해 우산혁명 시위와 같은 대규모 시위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법안 표결을 앞두고 범민주파가 지난 주말 반대 집회를 열었지만 참가자 수는 목표인 5만 명에 크게 못미치는 3000여 명에 머물렀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신경진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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