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연세대교수·신정학)|「가라오께」에 넋을 잃고 있을 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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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느덧 12월에 들어섰다.
저물어가는 한해를 조용히 한번 되돌아 볼때가 된것이다.
1984년은 어떤 해인가.
조금 있으면 국내의 주요 신문이나 통신사들이 다투어 이 해의 10대 뉴스같은것을 뽑아 보여주게 될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그러한 대신문사나 대통신사가 선정해주는 대 사건들 말고,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안방에 죽치고 앉아서 TV를 통해 시청이나 하고있는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는 또 그 나름대로 느끼는 1984년의 감회가 없을 수 없다.
만일 나에게 1984년에 있었던 일가운데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을 하나만 골라 보라고 한다면…. 글쎄, 나는 아무래도 「일본」에 관한, 그리고 「음악」에 관한 한 사건을 들지 않을수 가 없겠다.
지난 여름 어느날 한국방송공사의 제1TV채널을 통해서 군국주의 일본이 전전에 불러대던 「군깐마찌」(군함행진곡)와 그것도 모자라 행진곡조로 편곡한 「기미가요」(일본국가)를 그런줄도 모르고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1천만 시청자앞에 선물해준 바라 그 「사건」이다.
그것이 작은 「사건」이었을까? 집안에 처박혀 사는 한소시민의 사사로운 심기나 좀어지럽히고 만 일과적인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니 도대체 그따위 배경음악쯤은 그저 「음악」쯤으로 끝나고마는 것일까?
참, 그러고 보면 「조지·오웰」의 1984년은 하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별나게 음악적인 사건들이 풍성했던 한해이기도 했다.
새해 벽두, 역시 KBS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에선 방송의 제3채널이나 작은 실험극장 같은데서 소개하는 어느 전위 작곡가의 작품을 TV의 제1채널을 통해서 전국의 가정에 소개해줌으로써 문화 한국의 「선진화」, 아니 「전위화」를 선구하여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나 같은 보수주의자를 얼떨떨하게 해주었다.
그 다음엔 『돌아와요 부산항』의 가수가 당당히 현해탄을 건너가서 수많은 일본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폭풍적인 인기를 모았다는 이른바 음악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밀수입되었는지 자세히 알수는 없으나 적어도 내귀에는 올 여름부터 들려오기시작한 「가라오께」 선풍이라는 또 다른 「음악적인 사건」(?)이 그뒤를 잇고 있다.
70년대에는 그 「공공엲ㄴ 비밀요정」한번 구경을 못하고 말더니 이번에는 그 유명한 가라오께도 또한 그 정체가 무언지 구경은 못하고 말겠지만, 안가보아도 한가지 이미 분명한 것은 있다.
그곳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들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밀수입해온 노래가 아니면 「왜색가요」임이 틀림없을 것이려니 하는점이다.
조용필이 일본에서 부른노래도 틀림없이 한국사람이 작사·작곡하는 노래이기는하나 그와 마찬가지로 틀림없는것은 그것이 왜색가요라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용필 스스로 느끼고있는 모양이다.
현지에서 보도한 오느 기사를보면 일본에서 있어서의 『돌아와요 부산항』의 이상열기에 대하여 조용필 스스로 『그 노래 멜러디가 일본의 연가를 들어보고 한국의 흘러간 멜러디와 매우 비슷하다고 나 자신을 놀랄 정도였으니까요…』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나를 그토록 감동시킨 『한오백년』의 가창자 조용필은 과연 정확한 음악의 감각을 지녔다고 나를 안심시켜주는 한마디이다.
그렇다. 조용필이 일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조래나 그에 앞서 수많은 한국의 유행가 가수들이 불렀던 「흘러간」 멜러디는 그것이 아무리 한국사람이 작사·작곡한 것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왜색가요」들이다.
그비밀을 올 가을에는 가야금의 명장이자 작곡가인 황병기교수가 어느 글에서 명쾌하게 파헤쳐 주었다. 일제의 한국침략 이후에 쏟아져 나온 우리나라 유행가의 대부분이 일본 에도 (강호)시대의 「미야꼬 부시」(도절)에서 나온 이른바 「요나누끼」(단음계)라고 하는 철두철미 일본고유의 음계위에서 울고불고 하고 있다는 행명이 그것이다.
귀로 들어오는 음악은 사람의 마음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다. 어느가락에 나부낀다는것은 그 가락에 마음을 내준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위해서는 종교의 포교에 있어서도, 정치이데올로기의 선전에 있어서도 항상 음악을 앞세우는것은 그때문이다. 찬송가가 그렇고 「마르세이예즈」가 그렇고 「인터내셔널의 노래」가 그렇다.
그러기에 이미 2천5백년전에 「플라톤」은 밖에서 새로운 음계를 들여오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경고한바 있었다. 음악은 단순한 음악쯤으로 긑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반동정치가 「메테르니히」는 그의 강압정치에 대한 민중의 마취제로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장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음악은 곧 정치다! 일제치하를 산 한국사람이라면 명화 『카사블랑카』에서 울려대는 프랑스의 국가 「마르세이예즈」를 듣는 감동속에서 다같이 그를 실감했을 것이다.
우리가 가라오께의 왜색가요에 넋을 잃고 있을때 우리는 새로운 일본의 문화지배에, 아니 일본의 지배 그자체에 스스로의 성을 비워주는것이라고 보아서 그것이 단순한 기우에 불과하다고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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