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만|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76)|「구인회」의 소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박태원은 나와 제일고보 동창이었다. 3학년때부터 문학병에 걸려 신경쇠약이라고 학교를 쉬고 3B수라는 신경쇠약에 먹는 약병을 들고 다녔다. 2년이나 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법정대학에 적을 두었지만 학교에는 안 나가고 영화관이나 술집만 다녔다고 한다. 얼마있다 서울로 돌아와서 춘원에게 사사하더니 그의 추천을 얻어 동아일보에 중편소설을 연재하였다.
단편으로 『사흘 굶은 봄 달』이니, 『옆집 색시』 같은 좋은 작품을 발표해 호평을 얻었다.
나는 종명이 처음 구인회 인선을 할때 지용·효석과 함께 태원을 넣자고 하였지만 종명이 듣지 않았다.
그의 집은 차실동 7번지 광교천변으로 대문이 있었는데, 그의 형이 그 웃집에서 양약방을 하고 있었다. 태원의 방은 빨래터로 유명한 천변을 향해 들창이나 있었으므로 친구들이 이 들창에다 대고 『구보 있나!』하면 들창을 드르륵 열고 『누구야?』하고 태원의「갓빠」머리가 나타났다.「갓빠」머리란 무엇인고 하니,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하동」 의 머리라고 해서 일본의 세계적 양화가인 등전사활이 파리에서 이 머리를 해가지고 동경에 와 은좌를 활보하였으므로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머리 스타일이었다. 머리를 뒤로 넘기지 않고앞으로 길러 내려 이마에서 한일(일)자로 베는 식의 머리였다. 태원은 이 머리로 시내를 활보해 유명하였다.
구보란 태원이 스스로 지은 아호인데, 소설『구보씨의 일기』이란 것이 자신의 이야기였다. 이 태원의 방에 늘 나타나는 사람은 이상과 김소운이었다. 소운은 그때 『목마』 라는 아동잡지를 하였는데, 이상은 목마잡지사에 출입하면서 일본 화가 죽정죽웅의 그림을 모사해 『목마』의 표지에 썼다. 그밖에도 이상은 일본의 아동잡지에 나오는 그림을 많이 모사해 『목마』에 실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다음에 나오지만 그는 고등공업학교 출신으로 화가가 되려고도 하였다.
구보의 장편소설 『천변풍경』은 자기집 들창 밖에서 벌어지는 빨래터 이야기를 일본작가 시전인태랑의 『은좌팔정』에 견주어 쓴것이였다.
구보는 좌익을 늘 욕하더니 해방이 되자 어느 틈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그쪽 상허의 밑으로 들어갔다.
다음 이상은 하도 유명해져 젊은 사람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이사람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것 같다. 서울태생으로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나와 공목기수로 건축현장에 나갔다가 일본노동자가 잘못『리상 (이상)』 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상이라고 펜 네임을 지어버렸다. 한쪽으로 자화상을 그려 선전에 입선할 정도의 화재를 보여주었고, 다시 시를 쓰다가 나중에 소설을 써 『날개』라는 걸작을 냈다.
종로 네거리의 유명한 제비다방은 이상이 폐병요양을 위해 백천온천에 갔다가 동거하게 되어 서울로 데리고 올라온 기생 금강이와 같이 경영하던 서울의 명물이었다.
구인회에 가입해 크게 좋아하였고 장문사주인 화가 구본웅의 원조로 구인회 기관지 『시와소설』을 발간하였다. 이상의 힘이었다.
나와 이효석이 구인회를 탈퇴한뒤 이상은 상허와 의논하여 김유정·김환태·박팔양을 가입시켰다.
1936년에 모여사와 동거하다가 동경으로 탈출하였는데, 사상혐의로 경찰에 구금되었다. 다음해 4월 병세 악화로 동대부속병원에서 별세하였는데 28세의 요절이었다. 활동가이던 이상이 동경에 간뒤 구인회는 흐지부지 소멸되어 버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