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 "물건 가져오면 빈 그릇 보내겠나" | 남북 적십자 실무 접촉 6시간 30여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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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수재민 물자 인수· 인도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18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배 적십자 실무 접촉은 처음에는 물자 수송 수단이나 물자하역항 선정에 쉽게 의견일치를 보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육로수송 인도 장소를 놓고 배적측이 억지 주장을 고집함으로써 결국·접촉 6시간 30여분만에 결렬.
이날 상오 원칙적인 합의를 본 육로수송 문제에 있어 어디까지 물자를 실어올 것이냐를 놓고 우리측은 국제 관례와 수재민의 감정을 감안, 판문점까지 수송해 달라고 제의한 반면 북적측은 서울까지 직접 수송하겠다고 주장, 접촉은 난항에 봉착하기 시작.
○…점심휴식 시간이 끝나고 하오 1시부터 속개된 접촉에서도 육로물자 인도 장소를 놓고 팽팽한 대립을 유지, 접촉은 조금도 진전이 안됐다.
북적측은 접촉이 진전되지 않자 장소 문제를 제쳐두고 물자 인도를 위해 우리측 지역에 들어오는 북적 관계자 및 취재기자의 신변 안전 보장·직통전화 가설 문제 등 부수적인 문제를 제기, 초점을 흐리려 했으나 우리측은 원칙적이고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고 주장.
북적측은 또 이미 상오에 합의를 본 수송방법 등을 다시 거론하면서 『가서 위원장을 만나보고 오시오. 나도 위원장을 만나겠다』고 말하는 등 딴전을 피우기도.
그러자 이 수석대표가 『내가 살아온 인생 경험으로 볼 때 받는 측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와 인격이 존중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상부를 만날 필요도 없이 내선에서 결정할 수 있다』고 되받자 북적측의 한 대표는 초조한 듯 『어째서 서울까지 못가느냐』고 신경질적인 반응.
그러자 우리측 대표는 『물자를 수재민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냐, 문턱을 넘는 것이 목적이냐』면서 『만약 물건을 가지고 오면 우리 풍습으로 미루어 빈그릇으로야 보내겠느냐』고 여유있게 응수.
결국 이날의 실무접촉은 하오 3시쯤 북적측이 자신들의 제의를 받지 않으려면 다음번에 다시 접촉하자는 의사를 표시했고 그 후에도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가 하오 4시 18분 북적측이 『오늘의 접촉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고 협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21일 상오 10시에 만나자』고 제의.
이에 대해 우리측이 오늘밤까지라도 접촉을 계속해 모든 협의를 끝낼 것을 제의했으나 북적측은 21일 재접촉을 갖자는 말만 남겨 놓은 채 일방적으로 일어나 퇴장함으로써 이날의 실무 접촉은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실무 접촉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측 대표들은 여유있고 포용력 있는 자세를 보인 반면 북적측 대표들은 발언 때마다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읽거나 아니면 주위에 있는 다른 요원들이 전해주는 메모쪽지를 받고 서로 발언 내용을 숙의하는 등 경직된 모습.
특히 서울대 사대 교수이며 심리학자인 이 수석대표가 차분하게 우리측 입장을 설명하고 북적측의 주장을 조리있게 반박하자 북적 대표들은 『수석 대표 선생, 심리학자 답습니다. 탄복합니다』라며 궁지를 모면하려 애를 쓰기도 했다.

<판문점=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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