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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금 손실 vs 노후 난민, 뭐가 더 두렵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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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마이클 리드
피델리티 자산운용 대표

딜레마를 넘어선 트릴레마(trilemma)의 시대가 도래했다. 트릴레마는 숫자 3을 의미하는 트리(tri)와 진퇴양난의 상황을 뜻하는 딜레마(dilemma)의 합성어로, 삼중고의 상황을 뜻하는 신조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동료가 오늘 날 일본의 중년들은 트릴레마의 위기에 봉착했다고 전했다. 현재 일본의 4050 세대는 자녀 교육과 부모 부양을 책임지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노후까지 준비해야 하는 세가지 난제가 중첩된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트릴레마는 일찍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서양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다. 부모와 자녀를 향한 사랑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겠지만 나의 삶이 우선시되는 서양 문화권에서 부모와 자녀는 나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부양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은 아니다.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개인의 노후 준비, 자녀의 교육비, 부모 봉양 중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매기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의 노후 준비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일본의 트릴레마 세대가 남의 일 같지 않을 것이다. 일본과 비슷한 문화권일 뿐더러 고령화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릴레마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연금상품 가입, 창업 등 안락한 노후를 위한 다양한 대안이 있겠지만, 이러한 현실적인 준비에 앞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먼저 자신보다 부모와 자녀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한 번쯤 자신의 노후를 진지하게 상상해 볼 것을 권한다. 가급적 현실적으로 노후 생활을 가정해볼수록 좋다. 2012년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젊었을 때 노부모를 부양했지만 정작 자신의 노후는 자녀에게 의존하지 않는 샌드위치 세대다. 그렇다면 은퇴 이후 정기적인 소득이 없어졌을 때 자신과 배우자를 위한 생활자금은 확보하고 있는지, 여유자금이 없다면 은퇴 이후 생활을 영위해나갈 현실적인 대안은 있는지 등을 스스로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은퇴 이후의 삶을 그려봤다면 이제 실질적인 은퇴 준비를 위한 투자에 대해 재고해 볼 차례다. 한국에서 은퇴준비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2010년 피델리티가 한국 여성들의 은퇴준비에 관한 인식을 조사할 당시 응답자의 72%가 은퇴 후를 대비한 투자를 할 의향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준비를 위해 적극적인 투자에 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금손실에 대한 리스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노후준비는 현역에서 돈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은퇴 후에 조금씩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전략은 5~10년전까지는 실행 가능했을 지 몰라도 저성장·저금리가 고착화된 뉴노멀 시대에는 어렵다.

 적극적인 투자를 위한 사고의 전환은 투자와 노후난민의 리스크와 그 대안을 함께 생각해보면 쉽다. 투자 시에는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는 리스크가 있고, 은퇴 이후 준비가 미비하다면 노후난민이 되는 리스크가 있다. 통제할 수 있는 리스크와 통제가 불가능한 리스크, 이 두 가지 리스크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 있다. 당신은 어떤 리스크를 감수하겠는가.

 언어는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트릴레마라는 말 역시 만혼, 고령출산, 청년실업, 평균수명 증가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슈가 한데 얽힌 시대상의 반영이다. 5년 전만해도 노후, 은퇴라는 단어가 낯설던 한국 사회도 이제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한 다양한 솔루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은퇴 준비는 부모도 자녀도 아닌 자기 자신만이, 온전히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바쁜 일상 속 하루만큼은 자신의 예상 은퇴 시점과 은퇴 이후의 삶을 진지하게 그려보길 바란다. 자신의 은퇴준비를 바라보는 생각의 전환부터가 트릴레마의 덫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마이클 리드 피델리티 자산운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