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피격 1주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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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백69명의 생명을 앗아간 KAL기 피격사건은 가해자인 소련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아내지 못한 채 1주년을 맞게 됐다.
희생된 승객들의 유체나 격추된 기체가 모두 오호츠크해 깊숙이 수장되어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참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 모두가 겪은 처절한 비통과 악몽은 아직도 우리의 머리와 마음을 쥐어뜯고 있다.
그로부터 1년. 그동안 많은 인류의 양심들이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고 책임을 물었지만 크템린은 격추사실을 확인한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미·일등 피해국들이 소련에 대해 사과와 적절한 배상, 그리고 민간항공의 안전에 대한 보장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오히려 피격 KAL기가 소련 영공을 고의로 침범, 첩보행위를 했다고 뒤집어씌우고 있다.
소련 자신도 가입돼 있는 국제민간항공기구 (ICAO) 에서도 정밀한 기술검사를 실시, KAL기에 잘못이 없음을 여러 차례 확인했는데도 소련은 철면피한 적반하장의 태도로 일관해 왔다.
이러한 소련의 태도로 KAL기 사건이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의 파장은 더욱 커졌다.
「레이건」 미대통령의 대소 강경책으로 미소관계가 악화되어 국내에서 그에 대한 비판이 컸고, 그 때문에 인기도 크게 떨어졌었지만 KAL기 사건을 계기로 「레이건」은 인기와 지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후 「레이건」 의 반소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미소간의 각종 군비제한협상은 전면 중단상태에 이르렀다.
다수의 승객희생자를 낸 일본도 미국에 동조하여 일소관계는 경색상태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국은 두말 할 것 없이 우리 한국이다.
인명과 항공기의 희생과 그에 따른 국제적인 여러 가지 손실을 부담해야했기 때문이다.
한때 상당한 진전을 보였던 대소관계 개선도 전면적인 동결상태에 접어들었다.
그 때문에 우리 외교의 중요 과제인 북방정책은 크게 후퇴될 수 밖에 없었다.
최근 미국과 일본이 대소관계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제회의·학술관계 측면에서 소련과의 교류가 최근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지질도편찬위 회의에 우리 대표가 참석함으로써 재개됐다.
이 같은 경향은 국제정치 현실상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련군용기에 의한 비무장 민간항공기격추사실이 용서되거나 묵인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세계가 점점 국제화할수록 공중의 안전은 더욱 절실해 진다. 국제화시대의 인류안전과 법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도 소련의 시인·사과와 배상 및 민항기 안전보장은 기필코 받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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