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 운수면 대평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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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대가야의 푸른 들이 끝없이 펼쳐진 경북 고령군 운수면 대평동-.
임진왜란당시 참전했던 명나라장수 시문용이 뿌리를 내린 이후 그 후손들이 4백50년 동안 혈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집성촌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 군은 모두 철수했으나 그는 어깨의 큰 부상으로 철군에 합류하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했다. 이때 동료 서학도 시문용을 보살피기 위해 철군에 가담하지 않고 그냥 머물러 오늘날 절강서씨의 시조가 되었다.
대평동을 중심으로 인근 「배암골」「꽃질」「맞질」등 6개 자연부락에 1백20여 가구 6백여 명이 모두 한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다. 마을중앙 용암산 기슭에 지붕을 드리운 「염수재」는 시조 시문용의 위패를 모신 재실. 후손들이 시조가 살았던 옛터에 재실을 세워 매년 향사를 올린다.
시문용은 의학과 병법에도 조예가 깊어「병학기정」「의복결유」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에게 병법을 배운 대표적 인물이 유명한 이사용(성산이씨)이다. 명과 청이 중국대륙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던 1640년 이사용은 청의 원병강요로 명을 치기 위해 출전하는 부대에 징집 당했다.
당시 그의 직책은 포사. 그러나 이사용은 전선에 다다랐을 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 군을 어찌 공격하겠느냐』며 끝까지 포 쏘기를 거절하다 처형당했다.
죽음으로써 명에 대한 의리,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킨 셈이다. 이 같은 역사적 인연 탓으로 성주 일대의 성산이씨와 절강시씨는 한 집안처럼 우의가 두텁다.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예나 다름없는 논농사. 최근에는 유명한 성주수박·특용작물 등을 재배, 가구당 연평균 5백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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