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자판초대장」과 노동의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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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세상이 온통 먹자판, 놀자판이 되어 가는가 싶은 요즈음이다.
일간지의 면수는 증면되지 않고 있는데도 새벽에 배달된 신문을 집어들면 제법 무게를 느낄 정도로 무엇인가 속이 차있다. 신문속에 끼여들어 각 가정으로 침투하는 먹자판, 놀자판의 초대장 등이다. 바다로 놀러가자, 섬으로 놀러가자는 광고.
먹으러 오라, 마시러 오라, 쇼를 구경하려 오라는 광고…. 정통 구라파 식으로 레스토랑을 꾸미고 기다린다는 광고….
대만에서 명조리사를 직접 초빙해서 중화대제청을 차려놓았다는 광고…. 일본 사람「바까바까상」이 초밥을, 「고라고라상」이 튀김을 기술 지도하고 손수 조리해 올리는 본고장 일식을 시식해 보라는 광고….
(선진국 미국·일본에서도 한국사람이 노동허가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우리는 우리보다 잘사는 대만·일본의 요리사까지 노동허가를 내주어 부엌에서 부릴 정도로 그동안 조국의 선진화가 대약진을 한 것인가?)
텔리비젼은 텔리비젼대로 다시 노래며 그림으로 먹자판, 놀자판의「태평석대」를 광고해 주고있다.
지난 월여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큰 스캔들도 역시 따지고 보면 모두 다 먹자판, 놀자판의 스캔들들이었다. 그건 잘 굴러가던 흐드러진 판이「속도위반」이나「접속사고」와 같은 교통사고를 일으켜 재수없게시리 사람들의 눈에 들통이 났을 뿐이라고 꼬집는 사람도 있다.
구설수에 오른 향락산업이나, 공직자 축재나 그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다「먹고 놀겠다」 「놀고 먹겠다」는 한국 80년대의 치부계층의 생각이다.
부정적으로 바꿔서 얘기해보면 실컷 먹고도 일은 않겠다, 나는 물론이고 나의 자식·손자대까지도 일을 않고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차이가 있다면 향락산업의 말썽은「벌고 놀겠다」요, 부동산 축재의 말썽은「놀고 벌겠다」로 어순이 뒤바뀐 정도일뿐 양자에 공통되는 것은 돈을 벌되 일은 않겠다고 하는 이마에 땀흘려 노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 또는 기피태도다.
두 스캔들이 터지자 그때마다 사람들이 일에 대한 의욕을 잃고 허탈상태에 빠져든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의 값어치, 일하는 사람의 보람과 바람을 한꺼번에 풍비박산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서울의 같은 하늘 밑에서 저러한 먹자판, 놀자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동요」하지 못하고 이토록 뼈빠지게 일만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죽을 때까지 일평생 이렇게 일을 하고서도 저들처럼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을 만져 볼 수나 있겠는가 하는 자기 비하와 자포자기의 허무감이 거기에 뒤따른다.
향락·놀이의 값어치가 일방적으로 선전되면 선전될수록 노동·일의 값어치는 떨어지고 하물며 불로소득의 기회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노동의 의욕은 저하되기 마련이다.
80년대를 풍미하고 있는 먹자판, 놀자판의 세태는 그러고 보면 노동에 대한 멸시,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조소를 비수처럼 그 속에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결과할 사회불안·계층갈등·청소년 일탈행위 등의 제문제는 이미 그 안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건 선진조국의 떠들썩한 구호와는 크게 동떨어진 후진적인 일이요, 세계의 흐름으로 보아도 매우 촌스러운 일이다.
거기에는 우선 일과 놀이에 대한 그릇된 구시대적인 이분법이 있다. 일이란 괴로운 것이요 놀이란 즐거운 것, 일은 남을 위한 것이요 놀이는 자기만을 위한 것, 그래서 일은 되도록 안 할수록 좋고 놀이는 안 할수록 밑진다는 강박관념이「노세 노세」의 먹자판, 놀자판을 에스컬레이트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이란 반드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 일수도 있고 그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를 위한 것이다.
오토메이선, 로봇노동, 실업홍수로 시름하고 있는 구미선진국의 경우에는 일자리처럼 비싼 것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노동이 문자 그대로 향락보다 값비싼 것, 귀한 것이 되고있다는 것이다. 향락은 돈을 주면 살 수 있지만 노동은 돈을 주고도 사기가 어렵다는 역설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업자들한테 실업수당이란 돈을 주는 것이 그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보다 싸게 치인다는 얘기다.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특전이요, 그 반면에 노는 것은 특전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것이 『일 않고 놀도록 조주받고』있는 구미선진국의 실업자들이나 정년 퇴직자들이 실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일은 할 수도 없고, 일은 안 할 수도 없는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을 달리하라. 일을 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라. 「노동」이라는 낡은 개념을 버리고 「활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그를 대체하라는 말들도 들린다.
물론 우리들이 그러한 선진국의 대열에 끼기까지는 아직 길은 요원하다.
그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러나 우선 당장 시급한 것이 있다. 일하는 것이 정말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향락산업에 투자하는 돈줄을 노동환경의 개선에 투자토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먹자판, 놀자판에서 흥청대는「눈먼 돈」을 번 사람들의 돈줄을 잡을 수 있도록 세제와 세정을 바로잡는 일이다.

<필자양력>▲1933년 전북전주 태생 ▲서울대 문리대졸 ▲독일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중앙일보논설위원 역임

<저서>『정치와 언어』,『예술과 정치』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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