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010) 제80화 한일회담(209) 윤곽 드러난 일「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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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일회담은 62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수개월간의 소강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께다」 일본수상은 7월의 총재선거에서 재선관문을 무난히 돌파, 안정기에 접어들게돼 한일회담 추진에 다소 힘을 내게 되었다.
자민당 내에서는『군정하의 한국정부와 양국 현안을 결판 짓는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차츰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일본이 한일회담을 기피할때면 으례 등장하던△독도△평화선△주한대표부 설치문제도 잠잠해졌다. 대신 일본은 청구권규모등에 약간의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측이 상정하고있던「청구권」 카드의 윤곽은 이러했다.
△정부대 정부의 청구권은 인정치 않는다. 따라서 개인청구권만으로 우편저금·보험·은급등의 미지불분으로 7천만달러를 계상한다. △경제협력명분으로 무상원조1억달러규모를 제공한다.△기타한국의 5차5개년계획협력을 위해 장기저리차관을 제공한다.△한국정부의 청구권관장범위를 38도선 이남으로 국한하되 협정에는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
신임「오오히라」(대평) 외상의 구상으로 알려진 이 복안을 앞장세워 일본은 대한접촉에 나셨다.
그에따라 8월21일에는 배의환-「스기」(삼도조) 양측 수석대표회담이 5개월만에 재개되었고 일본측은 여기서 이「오오히라」 안을 우리측에 공식 제의했다.
일본측 안을 접수한 혁명정부는 배수석대표를 급거 귀국시켜 구수회의를 거듭한 끝에△총액규모에서 우리측 액수를 관철하는 것을 전제로△청구권+무상원조+차관이라는「오오히라」씨의 모개타결방식에 동의, 절충에 나서도록 했다.
청구권규모를 둘러싼 탐색과 절충은 9월 하순까지 한달 남짓한 기간동안 모두 7차례에 걸쳐 예비회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3차 접촉까지는 제법 순조로왔다. 양측은「순수 청구권+무상 원조+유상(차관)」이라는 공여방식에는 대충 합의를 보았다. 문제는 규모였다. 한국 측에서 볼 때 청구권에 무상원조와 차관을 포함시키도록 양해한 것은 중대한 양보였다.
국내에서는 이런 사정이 국민들에게 아직 구체적인 감으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고회의내의 일부 주체세력들간에도 이런 해결방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청구권이란 본래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당연히 받아야할 빚인데 이를 원조형식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빚을 받는 대신 새로 빚(차관)을 지는 격이 아니냐』는 것이 그 불만의 이유였다.
일견 순조로왔던 예비접촉은 규모문제가 구체적으로 거론된 3차접촉 이후부터 다시 교착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양쪽은 청구권규모를 놓고 서로 더이상 물러나지 않으려고 버텼다. 이때의 우리측 청구권요구액은△일반청구권 3억달러△무상원조 3억달러를 합쳐 6억달러선까지 내려온 반면 일본측은 이를 1억5천만달러선에서 묶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우리측의 배수석대표는 『한국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다. 이제 일본이 물러설 차례다』 라고 일본측의 성의를 촉구했고 일본은 이에 맞서『공(구) 은 저쪽에 가있다. 최종 회답만 기다릴 뿐』 이라고 딴전을 폈다.
그무렵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한일회담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국이나 일본이 다같이 어느 정도 국민의 비난을 각오해야된다』는 말로 일본의 성의를 촉구했으나 일본측은 이를 『한국이 중대 양보를 할 모양』 이라고 해석하는등 여전히 아전인수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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