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34. 태릉선수촌<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국 스포츠의 요람인 태릉선수촌.

영겁의 어둠 속을 꿰뚫은 순백의 빛줄기처럼 나의 뇌리를 관통하는 게 있었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목소리는 외치고 있었다.

"태릉, 태릉으로 가라!" 이것이 무슨 소린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혼자였다. 메아리처럼 잔향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태릉?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거기 무엇이 있기에?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라곤 그곳에 육군사관학교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영감과도 같은 그 미지의 외침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지프를 끌고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태릉, 태릉, 태릉이라…. 육군사관학교 정문을 지날 무렵, 나는 억!하는 외마디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숨이 막힐 듯한 강렬한 에너지가 나의 가슴 한복판으로 육박해 왔다. 멀리 우뚝 솟은 불암산의 봉우리를 한여름 오후 햇살이 비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봉우리가 굽어보는 공릉동 일대의 짙푸른 솔밭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우렁우렁 짙은 초록의 물결을 이뤘다. 나는 외쳤다. "바로 이거야!"

이 상서로운 대지, 이 넓은 땅, 여기에 자리를 잡자. 이 동산에 선수들이 뛰고 달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보자. 매머드 선수촌을 건설하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문화재관리국이 관리하는 태릉 일대가 유흥지로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울창한 송림을 낀 이 벌판이야말로 국가대표 훈련장으로 최적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거기서 영광스런 스포츠 한국의 미래를 보았다. 누가 그 땅을 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나의 육감은 확신으로, 확신으로만 치달았다.

내가 이 구상을 외부에 흘리기 시작한 것은 관계 당국과의 접촉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무일푼으로 착공한 체육회관이 힘겹게 한층 한층 벽돌을 쌓아 올리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 선수촌 건립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체육인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의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 왕릉이 산재한 곳에 선수촌을 세우겠다는 나의 계획에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관계 장관들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시간을 끌다가는 계획이 백지화될 것 같았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또다시 청와대로 달려가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했다. 박 대통령도 문화재와 관련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고심 끝에 단안을 내리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한 그루의 나무도 상하게 않게 시설하라"는 것이었다. 1965년 8월 10일의 일이었다. 흔히 태릉이라고 불리는, 서울 성북구 공릉동 산 223의 4에 있는 임야 9786평을 임대하게 된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넘쳐났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