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환경 조사서/노선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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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올해 3학년으로 올라간 우리집 아이가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의 용지를 가지고 왔다. 부모들의 학력, 생활상태, 가족상황 등 여러가지가 적혀 있었다. 우리집은 그이와 나, 그리고 3남매를 둔 평범한 가정이다.
우리집 아빠는 공무원으로 결혼10년에 접어 들었으나, 아직도 우리의 보금자리를 갖지 못하고 남의 집 셋방살이를 살고 있다.
문제는 학교에서 가져온 가정환경조사서의 생활정도난에서 시작되었다.
『집도 없고 너희들에게 맛있는것도 사주지 못하니 생활정도는 상·중·하에서 하에 동그라미를 해야겠구나.』
『아빠,「하」가 뭐야?』
『부자가 아니고 별로 잘 살지 못한다는 뜻이야.』
갑자기 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무심히 한말에 딸은 상처를 크게 입은 모양이다. 가난한것이 부끄럽다는 아이의 울음에 나로서는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집이 가난하고 비록 풍요한 생활은 못하지만 얼마나 화목한가. 그리고 알뜰히 살아 얼마 안있어 좋은집도 마련하게 될것이라는등의 이야기로 겨우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했다.
내가 어릴때 신학기가 되면 가정환경을 조사하러 선생님께서 그 시골길을 걸어 가정방문을 오셨다.
학교에선 명랑하고 쾌활하던 내가 선생님께서 우리집에 오시면 인사는 커녕 뒤곁에 숨어버리기가 일쑤였다.
누추한 시골집이 어린 가슴엔 그렇게 부끄러울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도 그때의 내 심정일 것이다.
큰 아이의 담임선생님께서 혹시 가정방문을 오시면 큰아이가 부끄럽지 않게 따끈한 차라도 드리면서 우리의 화목한 가정을 보여 드려야겠다. <경남남해군남해읍아산리396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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