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7) 제80화 한일회담(1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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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나는 「다울링」 주한 미대사의 중재안을 검토한 결과 미국측만 믿고있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다 놓쳐버릴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측은 일본측의 위신을 지나치게 고려해 자꾸만 우리에게 불리하게 중재안을 수정, 제의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7월 28일 이대통령에게 미국측의 중재타결을 기다릴게 아니라 우리가 일방적으로 한일회담 무조건 재개와 상호억류자 석방을 제의토록 유태하 주일대사에게 훈령토록 하자고 건의했고 이대통령도 이를 바로 허락했다.
그러나 이날 일본은 종래 그들이 그렇게 공언해왔던 국적승인 단서를 헌신짝 차버리듯 태도를 표변해 우리의 뒤통수를 쳤다. 이날 일본각의는 일적이 북적과 합의한 북송계획에 국적당국의 정식 승인 없이 그대로 조인토록 결정했던 것이다.
일본의 태도표변은 원래 그 속성이긴 하지만 북송에 관한 일본의 변화무쌍한 작변은 재일한국인을 쫓아내자는 국민적 광기 그것이었다.
국적 승인이라는 전제에 승산이 없다는 징조가 나오자마자 일본은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송강행을 결행키로 한 것이다. 국적은 이즈음『귀환문제자체는 일본·북한적십자사 책임아래 실행할 것이며 국적은 일적의 송환업무의 실행에 필요한 조언과 원조를 준다는데 그친다』라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밝혔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은 미국을 통해 우리측의 동향을 탐지하고 있었다.
일본측으로서는 우리측의 제안이 공개될 경우 국적으로부터의 승인 획득은 한층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북송에는 일본정부가 일적의 업무처리에 필요한 36만 달러의 지출정도로 끝나지만 한국 귀환자에게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해야한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북송강행에는 일본이 시쳇말로 손 안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장치가 있었으나 한국귀환에는 골치 아프고 복잡한 문제가 따랐기 때문이다.
실리의 교량과 계산에 빠른 일본은 일을 벌여놓으면 미국의 불만쯤은 가볍게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그대로 적중됐다.
조장관을 비롯한 외무부간부들은 28일 이같은 일본측의 태도를 보고 받고 29일 밤 늦도록 대책을 논의했다. 나는 또 이같은 정세변화에 대해 이대통령에게 설명하고 그럼에도 우리의 예정된 제의는 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다.
이대통령은 재일한국인의 본국귀환을 면밀히 추진하도록 검토하라고 일하고 동경과 제네바대표부에 어떻게 하든 북송이 좌절되도록 최대한 노력하라고 훈령토록 지시했다.
나는 이날 저녁 「다울링」대사를 불러 미국이 일본측을 지지하고 있다는데 어찌된 것이냐고 힐난했다. 그는 『완전히 오보』 라고 말하고 『미국이 한일간의 중재를 하기 위해서는 한국측이 두 가지 선결조건을 응낙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북한과 회담을 재개할 경우에도 한국은 한일회담을 다시 결렬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야하며 미국은 한국 귀환자에 대한 정착보조금을 원조할 준비가 되어있으나 일본측에 「보상금」명목으로 그에 응하라고 압력을 가하기는 어려우므로 한국정부가 이에 양보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같은 한국정부의 결정은 내일보다는 오늘이 좋고 내주라면 실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제하며 『미국측이 요청한대로 우리는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미국측이 회담무조건재개를 요청해놓고 우리가 그렇게 하자니까 다시 당신들이 조건을 내거는 것이 무조건 회담재개인가』라고 반박했다. 「다울링」대사는 이에 대해 머뭇거리다가 『어쨌든 그 두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미국은 중재할 수 없으며 미국측의 조언을 한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양측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조로 말했다. 강자의 논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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