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잘못쓰면 목 죄는 올가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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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는 잘 사용하면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목을 조여오는 올가미 같은 것이다."

카드 신용불량자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친형제를 포함한 20대 남자 3명이 카드 빚을 갚기 위해 강도 짓을 벌인 뒤 이를 괴로워하다 동반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의 일부다.

21일 오전 8시쯤 부산시 금정구 금정산 북문 인근 등산로에서 백모(29.회사원.부산시 부산진구)씨와 친구 정모(28.회사원.부산시 강서구)씨가 나무에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등산객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백씨의 동생(26.무직)도 인근에서 수면제를 먹고 흉기로 자해해 목에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 3명은 1천만~1억원대의 신용카드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숨진 白씨는 '이 글을 보시는 분께'라는 제목의 유서에서 "사람들이 빚을 지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궁지에 몰리면 엉뚱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며 "잘못된 생각으로 너무 쉽게 카드를 사용하다 빚만 지고 궁지에 몰려 큰 죄를 지었다"고 후회했다.

白씨는 인터넷 관련 업체에서 근무하다 1억원 가량의 카드 빚을 진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白씨가 인터넷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다 1억원 가량의 빚을 진 것 같다"며 "빚에 시달리는 것을 보다 못해 白씨의 삼촌이 수천만원을 갚아 주기도 했으나 해결이 안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白씨는 결혼 약속을 한 여자(29)의 카드까지 훔쳐 결혼자금 가운데 수천만원을 몰래 인출했을 정도로 카드 빚의 중압감에 시달려온 것으로 수사결과 드러났다.

사진촬영 관련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던 정씨는 경험 부족 등으로 4천만원 가량의 카드 빚만 떠안은 채 사업을 포기하고 최근 모 경비업체에 취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직 상태인 동생 白씨는 유흥비 등으로 1천만원 가량의 카드 빚을 진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확인됐다. 카드 빚 독촉에 시달리던 이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지난 19일 오전 4시 경남 양산시 하북면 李모(46)씨 집에 침입해 금품을 챙기다 李씨와 李씨의 아들(17)에게 발각되자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이들은 범죄에 대한 죄책감과 카드 빚에 대한 비관이 겹쳐지면서 집단 자살이라는 막다른 길로 내달았다.

결국 이들은 자살 하루 전인 20일 빨랫줄 등 자살도구를 준비해 금정산에 오른 뒤 다음날 집단 자살을 감행했다. 사건 현장에는 이들이 밤새 마신 소주와 맥주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잘못이지만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괴로워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자기 일 아니라고 생각들 마시고 카드가 꼭 있어야 되는 것인지…. 젊은 사람들은 카드 사용의 심각성을 잘 모릅니다. 저 역시 몰랐습니다."

숨진 白씨가 남긴 유서의 필체는 헝클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부산=김관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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