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병인교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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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병인년 겨울의 천주교 박해를 촉발한 중요 요인의하나는 프랑스함대의 강화강침입사건이다. 「로즈」 사령관 지휘하의 프람스 군함4척이 1866년10월13일 강화도에 상륙, 이해 불군문호수된 프랑스인 신부7명의 순교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통률을 공격, 점령하자 고종과 대원군은 서울의 4대문에 격문을 붙여 프탕스군대를 물리칠 의병을 모았다.
대원군은 10월22일 조정대신들에게 서양인을 물리쳐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뜻을 굳게 밝히고 『서양인들과 화친함을 허락함은 나라를 파는것이 된다』고 역설했다.
프랑스함대가 겨울날씨로 물러가자 조정은 이해11월21일 형조·사헌부·한성부·사간부· 좌우포도청· 8도·4도의 각진영에 천주교인을 남김없이 찾아내 처형하라는 명을 내리고,월말마다 그 결과를 조정에 보고케 했다. 한편 20명이상의 교인을 잡아들이는 사람은 좋은 지방의 변장으로 보낸다는 현상(?) 을 걸기도 했다.
천주진영은 이같은 초정의 명을 하달받고 이해12윌5일 포졸들을 두패로 나누어 「교인마을」로 알려진 대성동과· 성지동읕 뒤져 7명의 처추교 신자를 불잡아들였다.
이들은 옥사에 투옥된지 1주일만인 l2월13일 동시에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순교했다 (도표) .
다만 조화서·조문호부자가 당시 국법상 부자 동시처형이 금지돼 있어 「동시참수」를 면하고 10일간적으로 처형됐을 뿐이다.
오는 5월 성인품에 오르는 이들 7명의 성인은 모두가 충청도 출신이었다.
최량업신부의 복사일을 여러햇동안 맡아보았던 조화서 성인은 기해교난때 순교한 조안드레아의 아믈로3대가 순교했다. 동시 참수된 6위의 성인 시채는 처형 3일뒤 남녀교우들의 손에 의해 처형장 근처인 용마루에 옮겨묻혔다.
이명서·정원지 채선지 성인등의 유해는 그 다음해 이성인의 아들이 용마루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이장했다.
시성되는 천주교 한국인성인 93명의 후손에 대한 공식조사가 아직까지 없다.
천주교는 뒤늦게 후손조사를 서둘러 각교구별로 조사를 실시,이달말 수집할 예정이다.
일반 매스컴에서 시성을 1기로 발굴한 현재까지의 성인 후손은 직계로 최기직 남평화교수 (한양대)가 있을 뿐이고, 방계후손으론 김염수수녀(서울영등포성당) 황성규씨 (서울동대문구이문동367의33) 정도다.
남교수와 김수녀·황씨등은 모두 병인교난때 순교한 남종 우세영·황석두성인의 후손들이다.
남교수는 남성인의 각계증손자이고, 김수녀는 우섬인 조카의 외손녀.황씨는 황성인의 5대 방계손이다.
병인교난 후에도 1868년, 1871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명훼손사건과 미국상선 재너털셔먼호사건으로 순교의 교난이 계속됐다.
「오페르트느」「페통」신부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교인들과 한국교인들이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대힌 복수심으로 덕산의 남연군무덤을 파헤친 사건은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가열화했다.
이같은 남연군무덤의 훼손사건은 천주교의 조선 환교사에 하나의 큰 오점이다.
만약 한국인이 프랑스를 침입, 그들 조상무덤을 파헤친 먼역사의 기록이 있다면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한국인의 발길을 들여놓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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