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불법 도청과 '3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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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은 수사는 검찰이 하되 내용의 공개 문제는 민간위원회에 맡기자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특검이 수사도 하고 내용 공개도 결정토록 하자고 맞섰다.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했고 접점을 찾지 못했다.

약 한 달이 지났다. 지난주 열린우리당은 진전된 안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이 주장했던 특검안을 받기로 한 것이다. 주변에선 합의가 될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이번엔 한나라당이 다른 입장을 보였다. 한나라당은 22일 "검찰 수사가 이미 상당 부분 이뤄진 상태에서 특검을 하자는 것은 검찰 수사를 방해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특검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던 한나라당이었다. 그런 한나라당이 여당의 특검 수용안을 수사를 방해할 의도라고 몰아붙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혼란스럽다. "한나라당이 이른바 X파일 내용이 공개될 경우 받을 도덕적 타격을 두려워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 아니냐"는 여당 측의 의심이 그럴듯해 보일 정도다.

대승적 차원을 강조하며 특검 수용으로 방향을 선회한 열린우리당도 큰 소리칠 자격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최근 검찰이 신건.임동원 전 국정원장을 구속한 뒤 호남의 민심 이반 가능성이 커지자 갑작스레 검찰 대신 특검을 택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행정부 소속의 검찰보다 정부와 무관한 특검이 수사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특검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물론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도 작용했을 것이다.

특검 수용이 여당의 주장처럼 '선의의 결단'이라기보다 당리당략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이 한창 수사 중인 사건을 집권당이 앞장서서 빼앗아 특검에 넘기겠다는 발상도 의아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찰의 위상을 거론하며 특검이 안 된다고 소리쳤던 그들 아닌가.

양당은 이번 사건을 두고 연일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한 달도 안 돼 소신과 정책을 바꿨다. 이러니 정치권이 3류도 아닌 4류로 대접받는 것이다.

전진배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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