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한·일 외교의 엇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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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현재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는 정치.외교적 이슈에는 역사인식 및 독도와 같은 영토 문제 등이 있다. 이 두 가지 문제야 애당초부터 존재했다고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 등장 후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라는 매우 상징적인 정치행위가 추가됐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태평양전쟁 이후 전범을 규정한 도쿄국제재판이 무효인지와 연관돼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내 우익과 총리의 상징적 참배가 도쿄전범재판의 효력 논쟁에까지 이를 조짐을 보이자 2005년 8월 미국 의회에서 도쿄국제재판은 유효하다는 결의를 내놓으면서 일본에 명백하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현재 고이즈미가 보여 주는 대아시아 외교는 독단적이고 일방적이다. 중국과 한국의 과거 상처를 후벼파고 미래의 자부심을 갉아내는 것과 같은 자극 외교다. 이 때문에 일본은 아시아에서 고립 위기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고이즈미 외교를 이미지와 실리 양 측면에서 분석해 보자. 고이즈미는 야스쿠니와 관련해 주위의 압력에 굽히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간다는 우직함을 강조한다. 일본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내와 끈기를 통해 일본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국민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이를 사용한다. 사건의 본말을 완전히 전도해, 주변국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강하게 투사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기싸움이기 때문에 일본은 먼저 흐트러질 수 없고, 버티면 주변국이 양보할 것이라는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그러면서 그는 실리를 이야기한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의 정치적 갈등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무역과 투자, 교류는 지속돼 왔고 일본 경제는 미약하나마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다. 고이즈미의 입장에서는 주변국과의 정치적 갈등이 오히려 자신의 국내 입지를 받쳐 주고 국민의 지지를 얻게 해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이즈미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 강경하고 6자회담 등에서 소극적이며 냉소적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일본 우익이 생각하는 일본의 외교적 실리라는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현재 일본 우익외교의 기틀을 제공하는 일부 인사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한반도의 통합과 통일로 이어지고, 북.일 관계 개선은 일본의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의 부담을 안겨 준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통합은 일본에는 커다란 도전이 될 수 있고, 장기침체를 겪은 일본이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해서 얻을 게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사고방식과 분석틀은 문제가 있다. 장기적으로 북핵 문제 해결과 함께 6자회담의 틀이 동북아 다자체제 형태로 발전해 갈 수밖에 없다. 이때 일본이 소극적이면 손실이 이득보다 크고 고립될 우려가 있다. 일본의 국가이익은 주변국과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북.일 관계 개선을 통해 동북아 다자협력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양자 외교틀에만 매달려서는 일본의 이익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일 관계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일본은 아시아 주변국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한.일 관계는 선린우호 관계이지만 한국은 역사와 영토 문제에서는 추호도 흔들림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한.일 양국은 실현 가능성이 작은 소망에 찬 기대보다는 명확한 정보에 입각한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을 해 목표를 정해야 한다.

김성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