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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그리고 국민정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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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가장 크게 문제된 것은 철도 요금이었다. 대기업들은 철도회사들과 막후 협상을 벌여 요금을 대폭 할인받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공식적으로 요금을 할인받을 수 없으니까 일단 정규 요금을 낸 뒤 철도회사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았다. 대기업들은 대규모 물동량을 제공하기 때문에 할인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규 요금을 낼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들은 이것 때문에 경쟁에서 밀린다고 생각했고, 농민들도 농작물을 실어내는 데 산업가들보다 더 비싼 요금을 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기업들은 또 경쟁자들을 싼값에 사들였다. 여기에는 "회사를 팔지 않으면 가격 전쟁을 벌여 망하게 만들겠다"는 협박과 함께 "당신의 주식을 우리 주식과 바꾸면 앞으로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다"는 회유가 동원되곤 했다. 모건 같은 금융인들은 경쟁을 통해 망하는 회사들이 생겨 부실 채권이 많아지는 것을 싫어했고, 또 기업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업의 트러스트화(trustification)를 적극 지원하거나 주도해 나갔다.

미국에서 진보의 잣대를 재계에 처음으로 들이댔던 대통령은 1901년 취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당시 보수 공화당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진보적 생각을 갖고 있던 루스벨트는 전임 대통령 때 유명무실하던 반(反)독점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트러스트들을 통해 미국 경제가 강인해졌고 이들이 앞으로 미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자신의 목표는 "좋은 트러스트는 살리고 나쁜 트러스트는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중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언론은 대기업 때리기에 앞장섰다. 화가 난 루스벨트는 언론의 "부패 추방을 위한 십자군전쟁"을 치하하지만 "만악(萬惡)이 기업인들과 관련돼 있고 부자들에 의한 부패만이 사회에서 유일한 악인 양 국민이 믿게끔 만들지 말아 달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한번 바뀐 국민정서는 고착돼 갔다. 루스벨트 퇴임 뒤에는 민주당이 트러스트 해체를 정강으로 채택하니까 보수 공화당 대통령 후보도 따라갔다. "한 대선주자는 두뇌 없이 큰 머리를 갖고 있고 다른 대선주자는 창자(guts) 없이 큰 배를 갖고 있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루스벨트는 급기야 트러스트 해체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나갔다. 재임 중 금융 공황을 피하기 위해 파산 직전이었던 철강회사 TC&I를 유에스스틸(US Steel)이 인수하도록 반독점법 예외를 인정해 준 것을 놓고 "트러스트 세력의 협박에 넘어간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터무니없다(preposterous)"며 상황을 설명했지만 당시 언론과 국민 대부분은 '음모론'을 믿었다.

국내에서 기업 하는 분들을 만나면 흔히 듣게 되는 것이 정치와 언론에 대한 불만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틈만 나면 발목을 잡는다고 한다. "헌법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그리고 기업인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큰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기대는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어떤 대선주자가 당선되건 국민정서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또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언론은 각자 자신의 동력에 따라 돌아간다. 정치.경제.언론이 한 박자가 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이거나 특별한 상황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