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북·중 이야기(4)] 김정일과 장쩌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장쩌민(1926~) 전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두 사람의 만남은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모두 네 차례나 만났지요.

그 가운데 김정일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2000년 5월이 가장 드라마틱했지요. 그 때가 두 사람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전 세계 언론들은 ‘은둔의 지도자’의 중국 방문과 그 해 6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의 렌즈에 담았지요.

장쩌민은 과거 중국 지도자들이 김일성을 대한 것처럼 그를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양국의 ‘혈맹 관계’를 유감없이 과시했지요. 장쩌민과 김정일이 만나기까지는 8년(1992~2000년)이라는 긴 냉각기가 필요했어요.

그 8년의 시작은 1992년입니다. 바로 한·중 수교가 체결된 해이지요.

한·중 수교는 김정일에게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요. 당시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등 북한의 주요 요직을 맡아 80살의 아버지를 대신해 북한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한·중 수교는 한·소 수교(1990년 9월 30일)에 이어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결정타였지요. 김일성은 그래도 중국과의 오랜 인연을 고려해 중국에 점잖게 얘기를 했지요. 그는 한·중 수교 체결하기 한 달 전에 평양을 방문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에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중국과의 우호 관계 증진을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자주적으로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또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정일은 몇 년 뒤 1998년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해 완융상(萬永祥) 대사에게 한·중 수교에 대해 아무런 의의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지요. 김정일은 “한·중 수교는 중국공산당이 결정한 사안으로 조선은 0.001%도 이견이 없다. 나 자신 역시 아무런 이견이 없다. 다만 조중(북한과 중국) 친선만 변하지 않으면 충분하다”고 희망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거칠게 표현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지요.

장쩌민은 첸치천의 방북 보고를 받고 매우 흡족해 했어요. 장쩌민은 ‘숨은 거인’ 덩샤오핑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는 중국의 경제 발전과 한국·대만의 외교 단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한·중 수교를 서둘렀지요.

덩샤오핑은 그의 생각을 1989년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김일성에게 “중국의 한국 정책은 중국 내정에 관한 문제이며 중국의 독자적인 입장에 따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지요. 게다가 그는 김일성의 감정을 무시하면서까지 “한국과의 교역은 지리적으로 가까우며 거래하기도 좋아 중국에게 좋은 시장”이라고 덧붙입니다.

이런 덩샤오핑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장쩌민은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서둘렀지요. 한국의 북방정책과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맞아 떨어져 1992년 8월 24일 중국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한국의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의 첸치천 외교부장이 수교에 서명했습니다.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