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웅의 오! 마이 미디어] '광고주 편향 기사'로 공격 받은 텔레그래프 … "타임스·가디언도 똑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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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기자의 사표 한 장으로 영국 언론계가 벌집 쑤신 듯하다. 영국의 보수 정론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수석 정치평론가였던 피터 오본은 지난 17일 ‘나는 왜 텔레그래프를 떠났나’라는 제목의 공개 사표를 던졌다. 그는 지난해 말 편집진과 마찰 끝에 조용히 신문사를 떠나려 했는데, 신문사가 HSBC은행의 광고를 놓치지 않기 위해 편향적 보도를 하는 데 환멸을 느낀 나머지 공개비판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텔레그래프가 “독자를 배신했다”고 비난했고, 영국 언론사들은 좌우 할 것 없이 일제히 받아서 보도했다.

 텔레그래프는 즉각 오본 기자의 주장이 근거 없는 공격이라 반박했다. 이 정도면 그저 말 많고 탈 많은 영국 언론계의 해프닝이라고 해야겠지만 텔레그래프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 20일 1면 기사로 반격에 나섰다. 이례적인 익명 기사였다. 타임스와 가디언도 광고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타임스의 모기업인 뉴스UK의 사업국 직원 2명이 자살한 사태가 광고주 업무와 관련 있다고 암시하고 가디언도 애플과 같은 거대 광고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쓴다고 폭로했다.

 영국 언론인들은 텔레그래프의 물귀신 작전에 경악했다. 그런데 이것도 전부가 아니다. 해묵은 이념 전쟁이 시작됐다. 텔레그래프는 19일 사설을 통해 BBC·가디언·타임스가 이 사태를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이유로 반기업 정서와 집권 보수당에 대한 반감이 있을 것이라 피력했다. BBC·가디언·르몽드가 폭로한 HSBC 스위스 은행의 세금회피 의혹기사도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것이라고 했다. 이제 사태는 대기업, 정부, 야당, 진보지, 보수지 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변하고 있다.

 텔레그래프 편집국도 걱정이고 탐사보도의 정치적 동기도 궁금하지만, 이 사태는 이미 시작된 언론의 위기를 날로 보여주는 것 같아 우울하다. 요컨대 공중은 이제 기사를 보면 누가 이 기사의 후원자인지 묻는다. 그리고 해당 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을지 의심한다. 기사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은 언론 제도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된다.

 공중은 기사처럼 보이는 광고와 광고처럼 작용하는 기사를 경험한 지 이미 오래다. 네이티브 광고(기사형 광고)를 보면서 광고인지 아닌지 의아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 공중은 언론사가 스스로 광고를 제작해 광고주에게 팔러 다니고 있으며, 그것도 예상된 이용자의 구매력을 미리 계산해서 팔러 다닌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드나드는 언론사 사이트의 광고가 이렇게 우리 경험과 취향을 따를 리 없다.

 현대 언론은 공영이든 민영이든, 아니면 어떤 종류의 혼합형이든 후원자 없는 사업모형을 유지한 적이 없다. 그런데 후원자의 영향력에 대해 투명했던 적도 별로 없다. 이제 언론사는 내용과 편집에 외부 압력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누구에게도 진정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편집국과 사업국 간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공중에게 내용과 편집의 방향성을 투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요점을 깨닫고 실천하느냐 마느냐가 존중받는 언론이 될 수 있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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