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1)제80화 한일회담(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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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은 우리선박 반환요구에 대한 봉항마로 생각했음인지 조선우선 소속의 선박 5척을 자기네에게 다시 반환하라고 제법 강경하게 요구해왔다.
그들은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다른 각서를 증거로 들이대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조선우선소속 선박에 대한 50년2월15일 SCAP의 지시각서는 『한국에「대여」하는 5척의 선박에 대해서는 그 반환을 급속히 요구하지 말고 장차 적당한 시기에 하라』 고 되어있었다. 일본측은 이를 들어 『한국에 독립정부가 들어서 양국간에 선박회담이 열린 이 마당이 반환을 요구할 적절한 시기로 판단한다』 고 주장했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니 우리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측은『5척의 선박문제를 놓고 근본적으로 양국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데다 성격을 달리하는2개의 SCAP각서가 존재하고 있으니 선박위원회의 이름으로 SCAP당국의 공식해석을 구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무슨 요량이었던지 『SCAP에 대해 유권해석을 구하느니 보다는 양국간의 협의로 이 문제를 해결해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나왔다.
아마도 일본으로서는 SCAP에 이 문제를 들고 가보았자 「한국동란」이란당시의 특수성황 아래서 일본측에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기가 어려우리란 계산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뿐만 아니라 일본측은 어차피 다수의 선박을 한국에 반환해야될 입장이 뻔한 만큼 5척의 배를 돌려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협상에 유리한 카드로 쓰겠다는 속셈이었던 것같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이 문제에 관한 실망이 가 있었지만 협상은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해를 넘기게 되었다.
새해 들어 첫 선박회담은 1월19일 일본운수성에서 다시 열렸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우리정부가 국무원공고 14호로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 즉 「평화선」을 선포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때문에 회당 분위기는 첫날부터 차갑게 굳어있었고 일본측 「가와사끼」(천기)대표는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를 교환한 뒤 「평화선」문제를 끄집어내 우리정부를 맹렬히 공격했다.
평화선 문제는 별도로 좀더 자세히 기술키로 하고 여기서는 그이후의 회담진행상황을 추적해 볼까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52년들어 선박회담은 l차 한일회담이 결렬로 끝난 이해 4월까지 모두 세 차례의 회담을 더 가졌지만 쌍방간에 원만한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본회담의 결렬과 함께 4월1일 제33차 회담을 끝으로 자동 중단되었다.
이 기간중 우리측은 지금까지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증거서류와 추가선박 명단들을 입수해 일본측에 제시했다.
반면 일본측은 319일의 32차 회담에서 『한일양국간의 새로운 우호친선을 도모하는 동시에 한국부흥을 위해 조력을 아끼지 않겠다』 는 요지의 말끝에 이보다 앞서 양유찬 우리측 수석대표와 「마쓰모또 육송본) 일본측 수석대표와의 비공식 접촉에서 제시한 일본측 복안을 선박회담의 합의 사항으로 결정 짓자고 제안했다.
양·「마쓰모또」양국수석 대표 접촉에서 제시된 일본측 복안이란 『한일경제협력의 일 조로서 일본측이 상선 15척(총 5천6백10t) 어선 9척(3백36t) 조선우선의 문제선박 5척 (1만3백99t) 등을 한국에 「증여」함으로써 최종해결을 하자』 는 것이었다.
도대체 3백64척 7만8천t이상으로 추정되는 우리선박을 징발 또는 멋대로 끌고가 놓고 이제 와서 겨우 30척 2만t 미만의 규모로 해결하자고 나오는 일본측 태도는 한마디로 괘씸했다.
어디 그뿐인가. 당연히 받을 빚을 받겠다는 우리에게 「한국의 부흥을 돕기 위한 경제협력의 일환으로 증여을 운운하고 나오는 것도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측은 즉각 일본의 이러한 제안을 일축했다.
우리 대표단은 일본측이 그 동안의 회담과정에서 갖은 방법으로 요리조리 피할 구멍을 찾다가 여의치 않으면 그때서야 슬그머니 협상에 응하는 일본식 에누리작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일 소에 붙였던 것이다.
일본은 이에 다시 몇 척의 선박을 증가시킬 의사도 비쳐왔지만 그 이후의 협상은 본회담의 중단으로 1년 뒤인 2차 회담으로 넘어가게 된다. <계속> 유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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