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눈과 귀-밤낮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하오4시25분-.
보급소 문을 열자 귀에 익은 중앙소년 친구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언제나 같은 산뜻한 잉크내음이 코를 찌른다. 막 도착한「중앙일보」가 포장을 벗고있다. 『KAL여객기 피격, 승객 2백69명 참사』-시커먼 1면 기사의 제목이 눈을 찌른다.
불 속에서 금방 꺼낸 군고구마처럼 신문뭉치에서 뜨거운 김이 솟는 것 같다.
『단 한 부라도 빠지면 안돼. 박준규, 1백50부.』
재빠른 솜씨로 총무님이 갈라 안기는 신문뭉치를 끼고 마라톤 선수처럼 뛰어 보급소를 나선다.
오늘따라 발에 힘이 솟는다.
다른 신문보다 단1분이라도 빨리 내 독자들에게 이 빅뉴스를 알려야지….
대신고등학교 담을 끼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4년째 변함없는 코스, 눈을 감고도 훤한 골목길을 따라 뛰며 신문을 나눈다.
『신문이요!』
소리가 무섭게 문간에서 기다렸다는 듯 신문을 받아드는 독자들이 오늘따라 많다. 마중이 없는 집에는 신문이 젖거나 분실되지 않도록 정해진 곳에 얌전히 밀어 넣는다.
겨드랑이에 꽉 찼던 신문뭉치가 어느덧 가벼워진다. 등에 땀이 차온다.
발길은 무악재 고개턱에서 멎고 오늘의 임무도 끝났다.
후유- 가빠진 숨을 고르며 골목을 내려선다. 새 소식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푸짐한 뉴스를 전해준 보람에 뿌듯해진다.
1시간30분 걸리던 배달시간이 오늘은 1시간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숨가쁜 뉴스에 나도 몰래 발걸음이 바빴던 때문이리라.
매일 빼놓지 않는 수금과 확장을 오늘은 쉬기로 했다.
보급소에 돌아오니 10분전 6시. 배달을 마친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확장계획 등을 상의하고 집에 돌아오면 7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저녁을 먹고 나면 내 공부시간이다. 책상에 앉아 학과의 예습·복습을 한다.
다른 친구들이 놀 때 공부해야 한다는 각오로 아침이면 5시에 일어난다.
8시 등교할 때까지의 1시간 남짓이 나에게는 황금시간이다. 일자리를 잃으신 아버지를 돕고 내 학비는 내가 마련하자는 생각으로 중학2학년 때부터 「중앙일보」를 배달한지 4년째. 힘이든 만큼 보람도 컸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이지만 누나가 챙겨 3백만원짜리 적금에 넣고 있다. 대학공부도 내 힘으로 한다는게 자랑스럽다.
추운 겨울이나 비오는 날, 대문에서 간혹 「구독사절」의 쪽지를 볼 때, 신문 값을 깎자고 할 때 서글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4년째 얼굴이 익은 아주머니 아저씨의 『수고한다』는 다정한 한마디, 더운 여름날 시원한 사이다 한 컵을 권하는 인정에 보람을 되찾는다.
대학에 들어가는 날까지 「중앙일보」를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싱싱한 뉴스를 전하는 이 보람을 지키며 뛸 생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