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컴퓨터 원주민과 이주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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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호 27면

세상살이 좀 하다 보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이상한 세상에 들어와 살게 됐다. 내 생애에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줄이야. 컴퓨터가 논문 작성에 도움이 된다는 주변의 조언을 따라 유학 생활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구입해 사용하기 시작한 1988년에는 요즘처럼 이것 앞에 붙들려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데 컴퓨터가 도움이 됐기에 앞으로도 글을 쓸 때에는 익숙한 펜을 놓고 자판을 두들기겠다는 것을 무슨 큰 결심이나 하듯 했다. 이후 책을 읽거나 강의를 하는 경우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글을 쓸 때에는 첨단 기기를 사용한다는 자부심이 적지 않았다. 펜을 들어야 글이 쉽게 써지던 습관에서 자판으로 그 정도 효과를 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최근 당혹스러운 건 강의를 위한 PPT를 작성하거나 각종 공문서를 처리할 경우 조금 복잡한 작업을 만나게 되면 91년생인 나의 조교에게 묻거나 요청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조교가 태어나기 전부터 난 컴퓨터로 글을 써 왔는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더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닌 듯하다.

조교의 손놀림을 보면 마치 번개 같다. 작업한 내용을 보면 더욱 놀랍다. 그래서 “이런 것은 언제 배웠느냐” “어떻게 알게 됐느냐”고 물으면서도 놀란다. 설명을 듣긴 하지만 조교 없이 나 혼자 해낼 자신은 없다. 그래서 조교를 2년마다 새로 뽑아야만 하는 규칙이 불편하다.

교수 생활을 시작하던 91년에는 강의록을 들고 교실로 가서 읽기도 하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것으로 학생의 집중도도 좋았고, 나도 충분히 즐겁고 보람 있었다. 개설한 강좌의 강의에 관한 한 교수인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잘 듣고 받아쓰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요즘은 교수가 강의의 일부일 뿐이다. 빔 프로젝트와 컴퓨터를 켜서 준비한 PPT를 보여 주며 강의를 하다 문제가 생기거나 최근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할 경우에는 “이것 할 수 있는 학생 있나요”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한두 학생이 앞으로 나와 고쳐 놓고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돌아간다.

학교만이 아니다. 성당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6년을 본당 신부로 일했는데, 첫 번째 성당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내가 모든 것을 아는 위치였다. 하지만 세 번째 성당에서 나는 일부를 아는 사람에 머물러야 했다. 사무실의 수많은 공문서 처리와 강의, 심지어 강론에도 빔 프로젝트와 컴퓨터를 동원해야 하는 일이 잦았고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나서야 했다. 그들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지금도 이 글을 컴퓨터 앞에 앉아 쓰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는데도 나는 왜 자꾸 젊은이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점점 더 적어질까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게 솔직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교수에게 물었다. 그 교수의 답이 명언이었다.

“신부님은 컴퓨터 시대 이주민이고, 지금 젊은이는 원주민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주민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원주민이 될 수는 없는 건가. KTX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가는 컴퓨터 세상에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원주민을 이기려 하기보다 협조를 구하는 게 결국 난국(?)을 헤쳐 나가는 지혜일까.



전헌호 서울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석·박사 학위(신학)를 받았다. 현재 인간과 영성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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