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아동 고용 '나이키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그러나 일본기업은 이를 보고 코웃음 쳤다. 영국이 모델로 삼은 'QC(품질관리)'부터가 일본 도요타나 히타치가 이미 오래전에 고안한 기법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표준은 일본의 기업 문화와도 맞지 않았다. 예컨대 영국 표준에 따르면 공장의 물탱크엔 어김없이 자물쇠를 채워야 했다. 회사에 앙심을 품은 종업원이 물탱크에 극약을 넣을 가능성까지 대비하란 것이었다. '평생 직장' 개념이 몸에 밴 일본 직장인으로선 이런 규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87년 국제 표준을 만드는 '국제표준화기구(ISO)'가 품질관리에 관한 국제 표준인 'ISO 9000'을 공표하자 사정이 확 달라졌다. 영국의 끈질긴 노력으로 ISO 9000은 영국 표준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서자 유럽과 홍콩에선 ISO 9000 인증을 받지 않은 일본 기업을 아예 입찰에 끼워주지 않았다.

품질관리의 원조였던 일본 기업으로선 땅을 칠 노릇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이는 마치 외국인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해도 토플 성적이 없으면 미국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국제사회에선 또 하나의 국제 표준을 둘러싸고 국가 간 신경전이 날카롭게 펼쳐지고 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SR)'을 다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국제 표준인 'ISO 26000'이 그것이다.

이는 기업이 ▶뇌물 수수 등 부정부패▶남녀 차별.아동 고용 등 노동권과 인권침해▶환경 파괴 여부 등을 평가하는 잣대를 말한다. 이게 국제 표준으로 굳어지면 불법 정치자금을 주거나, 분식회계를 통해 회사 이익을 부풀린 기업 등은 국제사회에서 발 붙이기가 어려워진다.

국제사회가 여기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96년 나이키의 아동 고용 스캔들이 계기가 됐다. 그해 미국 '라이프' 잡지에는 12세 파키스탄 소년의 사진 한 장이 실렸다. 지저분한 공장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나이키 로고가 선명한 축구공을 꿰매는 모습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나이키 주가는 이 사진 한 장으로 곤두박질해 반 토막이 났다.

이 사건은 브랜드 가치나 성장성이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도덕성 시비에 휘말릴 경우 치명적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이후 세계 각국과 다국적 기업은 앞 다퉈 사회적 책임에 관한 자체 기준을 만들었다. 2001년 ISO가 국제 표준 제정에 나선 것은 세계 각국이 만든 서로 다른 표준이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말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회의에서는 ISO 26000의 골격이 완성됐다. 국제 표준의 제정은 2008년이 목표다. 다만 국가 간은 물론, 기업 간에도 이해관계가 엇갈려 순조롭게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국내기업은 20여 년 전 일본기업이 ISO 9000의 제정을 '강 건너 불구경'처럼 했다가 낭패 봤던 일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ISO 26000의 등장은 국내기업에 꼭 부담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국제 표준이 있다면 선거 때마다 되풀이돼 온 '정치자금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국내 '정서법'에 의한 도덕성 시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넓어지기 때문이다.

정경민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