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없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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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7면

인간처럼 환경에 잘 적응하는 존재도 없는 것같다.
우리집에서 TV가 없어진지가 3개월째 되는데,TV가 없으면 죽는걸로 알고 있다가 없어도사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작은 애가 오가며 스위치를 누르면 큰 애는 공부하다 말고 어느새 다가앉아 TV를 열심히 보는 것이 속상해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였다.
야단을 치는 나도 저녁준비를 하다가 무슨 특별한 것이 나오면 다 제쳐놓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무절제한 시청엔 화가 나서 신경질을 부리고,TV내용면에서도 밤낮 볼 것 없다고 툴툴거리는 내 소리가듣기 싫어 TV를 꺼버리곤 하는 남편과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TV를 없애자는 결정을 내렸다.
언제는 컬러TV가 시판되자 그것이 없으면 야만인이나 되는 것같아 부랴부랴 장만했었는데 이제 와선 미련없이 없애겠다니 .
사실 컬러TV를 살 당시에는 새로 시작된 교육방송에 기대를 걸었었는데 ,흥미 유발도 못시키는 편성이라든지,학교식 강의에 실망했으며 오락이나 드라머 위주의 방송에 있어서도 흑백시절과 비슷한 낮은 수준에 머무른 TV를 보자니 골치만 아프고 컬러라서 눈만 피곤한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불만투성이인 TV를 마치 신체의 일부분인양 끼고 앉아있던 것은 아이들을 다 재운 늦은 밤, 어쩌다 걸린 평화를 차 한잔 끓여 마시며보는 맛이 가끔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동적인 결정이든 어쨌든간에 TV가 없는 집안은 점차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야단을 쳐도 안 보던 동화책을 펴드는 시간이 많아진 큰 애를 볼 때와, 보든 안 보든 무조건 켜놓은 TV의 소음과는 달리 낮은 음악과 식구들의 두런거림이 집안을 채울 때 비로소 TV의 횡포에서 벗어난 후련함을 느낀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아뭏든 지금도 『저놈의 TV』하며 불평하는 많은 어머니들에게 TV를 없애도 사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김영민,서울영등포구여의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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