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큰'의 오프닝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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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리암 니슨이 50대 중반의 나이에 노익장 액션에 도전한 지도 어느덧 7년. 환갑을 넘긴 액션 히어로는 ‘테이큰3’(1월 1일 개봉, 올리비에 메가톤 감독)에서도 여전히 총을 잡고 동분서주한다. 오랜만에 다시 본 첫 번째 ‘테이큰’(2008, 피에르 모렐 감독). 액션의 파괴력만큼이나 인상적인 건 1분 남짓한 오프닝신이었다.

지금은 굵직한 액션 프랜차이즈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의외로 조용했다. ‘테이큰’의 첫 신. 1분간 펼쳐지는 이 장면은 크게 둘로 나뉜다. 전반부 30초는 홈 비디오의 거친 입자로 찍은 어느 여자아이의 생일 파티다(사진 1). 이어지는 후반부 30초는 전반부가 한 남자의 꿈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텅 빈 거실 소파에 앉아 잠에서 깨는 중년 남자. 바로 브라이언 밀스(리암 니슨)다.

(사진2)

대사 없이 진행되는 이 짧은 오프닝은 이후 전개될 이야기와 주인공의 삶과 내면 등을 암시한다. 먼저 전반부. 행복한 일상을 찍은 홈 비디오라고 하기엔 그 스타일이 예사롭지 않다. 화면은 심하게 흔들리고, 편집은 툭툭 끊긴다. 아이와 엄마가 말하는 소리는 사운드 효과에 의해 의미를 알 수 없이 뒤틀려 있다. 호러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다. 여기에 흐르는 피아노 선율의 다소 음산한 톤은 불안한 느낌을 더한다. 분명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꿈일 텐데, 왜 그 스타일은 악몽에 가까운 것일까. 영화는 매우 직접적으로 그 이유를 보여준다. 밀스는 딸의 사진이 든 액자를 보다가 손에 들고 잠에 들었다. 그는 탁자 위에 액자를 다시 놓는데, 이때 사진 옆에 ‘Taken’이라는 자막이 뜬다(사진 2). 꿈 장면의 불안한 느낌은 곧 누군가에 의해 납치될(Taken) 상황의 전조다.

(사진3)

그리고 ‘말’이 등장한다. 꿈속에서 다섯 살 꼬마는 말 장난감을 선물로 받는다(사진 3). 액자 속의 소녀는 말을 타고 있다. 그리고 오프닝신 이후 등장하는 소녀, 즉 밀스의 딸 킴(매기 그레이스)은 열일곱 번째 생일 파티에서 돈 많은 새아버지로부터 말을 선물 받는다. 말이 점점 실체화될수록 킴은 위험에 다가가는 셈이다. 여기서 말은 킴을 갇힌 삶에서 해방시켜 주는 그 무엇인데, 결국 그녀는 유럽으로 가지만 그 대가는 참혹하다. 반면 밀스의 꿈속에 등장하는 딸이 다섯 살에 머물러 있는 건(사진 1) 그에게 딸은 여전히 보호해야 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진4)

번쩍하는 플래시 효과와 함께 꿈은 끝나고 카메라는 현실의 브라이언을 보여준다. 그는 혼자다. 꿈속에선 딸과 아내 사이에 속하지 못한 존재이며, 현실에선 적막한 집에 혼자 산다. 앞에 놓인 테이크 아웃 중국 음식이나 별다른 장식이 없는 그의 집은 정착하지 못하는 그의 떠돌이 삶, 즉 전 세계를 누볐던 전직 특수요원의 삶을 보여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혼했고, 지금 그에게 가정은 없다. 그리고 잠에서 깼을 때 그를 둘러싼 어둠은 그가 평생 맞서 싸워야 했던 범죄자들과 악당처럼 그를 감싸고 있다. 이때 그는 소파 옆의 불을 켜고 액자 속의 딸을 보는데, 이것은 어둠으로 가득한 그의 삶에서 오직 딸만이 한 줄기 빛이라는 걸 드러낸다(사진 4).

(사진5)

1분 동안 지속되는 오프닝신은 이처럼 ‘밀스의 꿈’과 ‘꿈에서 깬 밀스’ 두 부분으로 정확히 30초씩 양분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두 부분을 이어주는 피아노 사운드다. 꿈 장면에 흐르던 다소 음울한 톤의 피아노 소리는 그가 꿈에서 깼을 때도 한동안 이어진다. 즉 이 소리는 밀스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피아노 사운드로 치환되는 밀스의 내면은 무엇일까? 그 의미는 킴의 열일곱 번째 생일 파티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밀스는 딸의 선물을 사서 정성스레 포장해 생일 파티를 찾아간다. 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은 딸은 기뻐하지만, 곧 새아버지가 선물로 말을 끌고 나오자 그쪽으로 달려간다. 선물 박스와 함께 덩그러니 남은 밀스. 이때 다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그는 집으로 가서 딸의 사진첩을 정리한다(사진 5). 그 사진첩엔 오프닝신의 꿈에서 봤던 딸의 다섯 번째 생일 파티 사진도 있다. 그는 그 사진을 어루만진다. 외로움과 그리움. 어쩌면 ‘테이큰’은 다시 가정을 가지지 못하지만 딸에 대한 사랑은 애틋하기 그지없는, 한 중년 남자의 고독에 대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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