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대 윤내현교수「기자조선」에 새학설 발표|「기자국」은 중국동북의 소제후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갖가지 학설 속에 미로에 빠져 있는 어른바「기자조선」의 정체를 밝혀주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와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단국대 윤내현교수는 최근「기자조선」를 통해『기자국은 중국동북부지역의 가장 변방에 있던 소제후국으로서 연국의 감시 하에 있다가 멸망하기 직전 장시 조선의 변경에 쫓겨와 있던 나라』라고 주장하고『따라서 기자국은 한국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기자조선」이라는 말 자체도 성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윤교수는 그간의「기자 연구」가 주로 문헌자료에 의존, 자료의 빈약에서 오는 한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상당수가 지나친 추리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고 오래전부터 갑골문·금문(청동기의 명문)·고고학 자료를 정리, 기자의 실체를 해명해낼 수 있는 근거를 찾아왔다. 그는 이밖에도 문헌기록, 고대사회에 관한 이론적 모델, 당시 중국과 그 주변상황 등을 연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즉, 기자 (작위이름·이름은 서여)는 원래 중국 상(은)왕실의 근친으로서 당시 최하층민이던 기족(성은 강)을, 다스리기 위해 지금의 하남생 상구현지역(지도(1))에 봉해졌다. 그후 주족에 의해 상왕국이 멸망하고 주왕실의 근친과 개국공신을 중심으로 분봉이 행해지자 작위와 통치지를 은 기자(성은 자)와 그 일행은 새로운 안주지를 찾아 이동하게 됐다. 그들은 지금의 하북성 승산지역(지도②)에 자리잡고 소국으로서 무국의 감시를 받게 됐는데 여기에 자리잡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족이 상왕국을 멸망시긴 직후 감옥에 갖혀 있던 기자가 소공 석의 도움으로 출옥했기 때문에 둘 사이는 비교적 친밀한 인간관계가 형성됐는데 연국은 바로 소공 석의 봉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안전한곳으로 생각됐다.
둘째, 최근 연구결과 당시 상황을 보면 변영성지역은 일찌기 기원전 20세기경에 청동기시대에 진입, 기자가 이동하던 기원전 20세기경엔 이미 강력한 토착세력이 형성돼 있어서 이곳을 통과해 그밖까지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기자와 그 일행은 새로운 안주지를 찾는 것이 목적이 있으므로 당시로선 중국의 가장 변경인 이 지역 밖까지 이동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사실이 여러 자료로 뒷받침된다.
기원전 3세기까지 약 8백여 년간 연산·오하(난하)서부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기자국은 중국이 전국시대에 돌입, 전쟁이 치일해지고 영토국가의 개념이 형성되면서 연국의 세력에 밀려 조금씩 동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그후 기원전 3세기말, 왕조가 성립되자 연국에 봉해진 노관(노완)이 기자국을 난하동부지역으로 밀어냈는데 이것은 기자국의 마지막 통치자인 준이 왕위에 오른지 20여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기자국은 멸망하기 직전 10년이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짧은 기간동안 오하의 동부유역으로부터 요령성의 서남부 귀퉁이에 이르는 발해연접지역 (지도③)에 위치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한 왕조에선 동북지역의 국경을 난하로 정하고 있었으므로 난하의 동쪽 조선의 변경에 위치한 기자를 이때부터「조선후 기자」로 부르게 됐다.
「조선후 기자」는 조선의 통치자가 됐다는 뜻이 아니라 조선땅의 변방에 있는 제후 기자라는 뜻으로 해석돼야 한다. 기자국이, 하동부 연안으로 밀려난지 수년 후에 위만 이란자가 연국으로부터, 하를 건너 기자국으로 망명해왔다. 그는 오래지 않아 중국의 망명객을 모아 준으로부터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니 준은 발해를 건너 도망쳤다.
결국 조선의 변방에 위치했던 소국 기자국은 이른바「기자조선」으로서 한국고대사의 주류를 이룰 수 없음은 물론, 기자국을 멸망시킨 위만 역시 주류에 위치할 수 있을는지 재검토해야할 문제다. 기자국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당시 이미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 강력한 토착세력을 이루고 있던 조선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시각에서 추진될 필요가 있다.
한편 그간 학계에서 의「기자조선」에 대한 논의는 ▲문헌사료를 토대로한「기자조선」부정설 ▲문헌을 토대로 개인이 아닌「기자족」이 수세기에 걸쳐 한반도에 유입, 고조선의 뒤를 이어 정치세력이 됐다는 설 ▲출토된 우리나라와 황하 (상왕실) 청동기가 달라 기자통치를 부인하는 설 ▲갑골문·금문 등에 나오는「기후」란 기록을 근거로「기자조선」의 실재를 주장하는 설 등 다양했다. <이근성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