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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를 조롱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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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재미 삼아 간단한 퀴즈로 아침을 시작해 볼까요.

<문제> 다음 중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①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 ②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③'반전(反戰) 엄마' 신디 시핸 ④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답을 찾기 위해 ①번부터 같이 풀어 보지요. 빈 라덴은 물론 부시가 제거하고 싶은 인물 목록의 맨 상단을 차지할 겁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사라지면 부시는 섭섭해할지도 모릅니다. 싸움 상대가 없어지기 때문이죠. 김정일은 중국이 결정적 역할을 한 6자회담 합의문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전처럼 막무가내로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시는 김정일에 대해 '겁 많은 개가 크게 짖는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시핸은 부시의 별장인 크로퍼드 목장 앞 1인시위로 미 전역에 반전 물결을 드높인 아줌마입니다. 그렇다 해도 부시가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미워한다고 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합니다.

출제자가 의도한 답은 ④번입니다. 엉뚱하다고요? 그러나 차베스만큼 부시를 엿 먹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시는 혼내줄 수단이 없어 번번이 당하고 맙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저명한 목사가 TV 생방송에서 "그를 암살해야 한다"고까지 했을까요.

"부시 대통령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다. 미국은 가장 야만적인 제국주의다." 9월 20일 세계 각국 대표가 모인 유엔 총회에서 그는 이렇게 퍼부었습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강타당한 미국에 100만 배럴의 원유와 500만 달러의 구호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할 때도 부시의 자존심을 확 긁어 버렸습니다. "세계 최강의 나라가 사전에 재난 대피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다는 건 믿을 수 없다"고 했고, 말미에 부시를 '휴가의 왕'이라고 또 꼬집었습니다. 크로퍼드 목장에서 긴 휴가를 보내다 카트리나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걸 빗댄 말이죠.

유일 초강국 미국의 외골수 대통령을 향해 이런 독설을 퍼붓는 뱃심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건 석유입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석유수출국이자 미주 대륙에서 유일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지요. 하루 270만 배럴을 생산해 그중 약 60%를 미국에 수출합니다. 미국 석유 수요의 15%를 공급하는 셈이죠.

9월 6일 차베스는 자메이카에서 카리브해 13개국 정상을 초청해 '페트로 카리브'란 석유동맹을 출범시켰습니다. 이들 나라에 자국 원유를 시세보다 30~40% 싼 배럴당 40달러에 공급한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주변국들은 웬 떡이냐며 좋아했습니다. 차베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원활한 석유 공급을 위해 이들 나라에 항구 건설을 지원하고 장기 저리의 차관까지 제공한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이 같은 그의 행보는 자선활동과 거리가 멉니다. 주변국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부시와 미국에 대항할 힘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페트로 카리브의 출범은 국가 간 에너지 확보전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지역 에너지 동맹의 출현이라는 점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모읍니다. 차베스는 이런 동맹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에 맞선다는 구상도 하고 있습니다.

집권 6년 반이 지난 차베스는 중국도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중국과 석유.천연가스 개발 협정을 맺은 것이지요. 그는 "지난 100년 동안 원유 개발을 미국에만 의존해 왔으나 이젠 이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며 또 부시의 신경을 자극했습니다.

그는 석유 팔아 번 돈으로 '남미은행' 같은 걸 세우는 방안도 추진 중입니다. 이번 유엔 총회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아르헨티나 국채 10억 달러어치를 매입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석유를 이용해 이른바 자주외교를 한껏 가동하고 있는 차베스입니다.

국제 무대에서는 힘이 정의입니다. 힘은 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석유처럼 확실히 돈 되는 것에서 나오지요. 그런 것 없이 목소리만 높이는 자주외교는 한마디로 '꽝'입니다.

심상복 국제담당 리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