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 도마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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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침에 눈을 뜨니 부엌에서 나지막한 도마소리가 들린다. 수십년동안 귀에 익어온 정다운 소리. 『아 참, 엊저녁에 어머니가 오셨지』 친정어머니의 도마소리를 들으니 왠지 포근해지며 갑자기 게으르고 싶어진다. 어렸을 적 이불속에서 눈을 떴을 때 부엌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도마소리는 우리 3남매에게 든든하고 믿음직한 안전신호였다.
며칠만에 딸네집에 들르신 어머니는 오늘 아침도 벌써 일어나셔서 조반을 준비하고 계신다. 나는 옷을 입고 가만히 어머니의 둥뒤로 다가갔다. 그런데, 눈앞에 오늘따라 더욱 더 좁고 가냘파 보이는 어머니의 어깨며 가느다란 목이 갑자기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어머니가 벌써 이렇게 늙으셨단 말인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무섭고 엄하시던 우리어머니가.
우리 형제는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매를 많이 맞고 자랐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잘못한 것을 모두 마음속에 넣고 계셨다가 한날 한시에 한꺼번에 불러서 추호의 용서도 없이 꾸중을 하셨다.
그리고 그런날 밤이면 밤늦도록 부엌에서 어머니의 도마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때 어머니가 만드셨던 음식속에는 뜨거운 모정의 눈물이 섞였을지 모른다.
나는 어머니를 방으로 들어가시도록 밀려다가 얼른 손을 거두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지금 딸네식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이 즐거울 것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다녀야만 했던 이삿짐과 자식들의 등록금, 결혼으로 이어진 많은 일들로 인해 이렇게 조그맣게 된 우리 어머니의 어깨를 그 어느 누구가 펴 드린단 말인가.
작은 올케의 말처럼 형제들이 모두 어머니가 사시는 동네에 모여 살면 좀더 기뻐 하시겠지. 어머니께서 마땅챦은 듯 혀를 차시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딸의 칠칠치 못한 살림솜씨가 또 튀어나온 모양이다. 자식들이 해 드리는 새 옷은 모두 장롱속에 담어두고 아끼시며 그 옛날 구닥다리 헌옷만 입고 계신 어머니의 잔소리가 하나도 싫지 않고 불경스럽게도 이 딸에게는 사랑스럽기만 하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77의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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