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오후가 되면 몸이 나른하고 흐물흐물해져서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금세 저녁이 옵니다. 그래서 오랜 만에 옷정리를 했습니다. 옷장문을 여니 머물 곳이라곤 여기 밖에 없는 옷들이 처연하게 제 손길을 기다렸네요.
어떻게 이런 예쁜 옷들을 옷장 깊숙이 꼭꼭 숨겨두고, 매일 집에선 헐렁한 옷만 입었는지. 마침 십년 넘도록 버리지 못한 옷들이 눈에 띄네요. 제 인생이 이렇게 미련으로 얼룩져있는지 몰랐어요.
낡은 팬티, 올이 나간 스타킹도 흐느낍니다. 다들 왕년의 스타처럼 빛났는데. 쓸모없으면 버리는 게 세상의 이치니 이것도 예외일 수 없군요.
아침 빨래가 마를 때까지, 태양 냄새가 풍길 때까지 옷장 정리를 했습니다. 그만 빨래줄에서 아끼던 푸른색 셔츠 한 장이 바람에 날아갑니다. 아아, 저 셔츠 속에서 울리던 제 청춘의 심장 소리도 날아가고 어깨 선에서 미끄러지던 옛 사랑의 손도 날아가네요.
셔츠 속에 지금보다는 젊은 몸. 제 세미 누드의 이미지도 사라지네요. 마악 달려가 잡았습니다. 셔츠에 담긴 추억을. 셔츠로 따뜻했던 시간을….
신현림 <시인.사진가>시인.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