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현대사의 한 장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07호 04면

며칠전 철지난 휴가를 가면서 챙겨간 책이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었습니다. 올해의 베스트셀러 1위라는 기록은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00년간의 현대사 주요 인물들과 주인공이 얼키고 설키는 과정을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만화처럼,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펼쳐내더군요. 수용소에서 탈출해 소련군 장군으로 변장한 주인공이 한국 전쟁 중인 북한으로 내려와 꼬마 김정일과 만나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작품의 후속편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를 먼저 읽었는데, 이 역시 역사의 주요 에피소드에 빚을 지고 있는 작품이죠.

요즘 극장가에 ‘국제시장’ 열기가 뜨겁습니다. 흥남철수부터 파독 광부, 베트남전, 이산가족 찾기에 이르는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아버지’들의 이야기죠. 특히 중장년 남성들의 입소문이 무섭습니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때 그 구구절절한 사연에 기말고사도 포기하고 TV 앞에 앉아있던 저로서는 말만 들어도 울컥해지네요.

그런데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여성 호르몬이 늘어나 눈물샘이 커졌는데 그걸 확인하러 간다는 게 왠지 부담입니다(그래서 ‘님아…’도 안 보았습니다). 같은 현대사의 한 장면이라도 경쾌하게 다룬 소설을 읽고 난 직후여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0년 쯤 뒤 2014년을 그릴 작품도 별로 유쾌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니 더 그렇네요.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