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56년 관직, 24년 재상 … 황희의 '장수 비결' 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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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방촌 황희 평전
이성무 지음
민음사, 540쪽
2만5000원

시대를 이끈 지도자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에이브러햄 링컨·오토 폰 비스마르크·윈스턴 처칠 같은 외국인을 떠올린다. 한국인으론 세종대왕·이순신 장군 정도 꼽는다. 왜 그럴까.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내고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는 지은이는 그 이유를 우리 인물에 대한 연구가 빈약하다는 데서 찾는다. 그런 결핍을 메우는 차원에서 황희(1363~1452) 정승의 평전을 완성했다.

 저자는 세종이 어전 회의에서 대체로 “황희 정승 말대로 하라”고 말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황희의 정치적 무게를 짐작하게 하는 발언이다. 관운에서 황희를 능가할 인물은 조선에 없었다. 90세를 살며 56년의 관직 생활 중 24년간 재상을 맡았으며 18년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을 지냈다. 태조·정종·태종·세종 4대를 모시며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이 교수는 이를 단순한 운이 아니고 지혜와 원칙이 만들어낸 결과로 해석한다.

 황희는 평소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일을 논의할 때는 큰일에 집중하고 세세한 사안을 번거롭게 변경하지 않았다. 회의에서 절대로 남보다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가 먼저 말을 꺼내면 다른 사람은 아예 입을 닫거나, 그의 발언이 옳다고 앞다퉈 아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의 말을 두루 듣고 마지막에 자기 식견을 총동원해 종합적인 결론을 내렸다. 말을 할 때도 적절한 사례를 들어 주변을 설득했다. 옳은 말이라고 무조건 자기 의견을 먼저 입에 올리고 아랫사람들에게 따르기를 강조하는 지금의 일부 지도자들이 새겨들을 대목이다.

 더욱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역대 국왕의 대접이다. 오랫동안 재상으로 일하다 보니 뇌물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하지만, 태종과 세종은 “재상을 대접하는 것이 그래서는 안 된다”라며 대간을 누르고 사건을 무마했다. 황희의 삶은 사람이 일하는 방식과 사람을 쓰는 방식을 함께 가르쳐준다.

 황희는 군주들의 팔다리 노릇을 충실히 했으나 의롭지 않으면 왕명이라도 듣지 않았다. 태종이 1410년 대사헌이던 황희에게 몰수당한 상당군 이저의 녹봉을 복구하라고 하자 “신이 주상의 뜻을 알기는 하나, 이 일을 어떻게 신의 뜻으로 독단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정해진 절차를 거쳐 처리할 것을 주장하는 기개를 보였다. 이저는 태종의 매부로 당시 연좌제에 걸려 공신 녹봉을 몰수당한 상태였다.

 1462년 문종의 내린 교서에 있는 다음 구절은 황희의 삶을 압축한다. “임금을 과오 없는 데로 인수하기를 완수하고 백성들을 안정한 데로 이끌기를 힘썼으며 조정의 법도는 뜯어고치기를 좋아하지 않고 평소의 논의는 모쪼록 관후함(너그럽고 후덕함)을 힘썼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아쉬운 것은 황희 같은 큰 인물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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