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순수한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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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74권째인 '이솝 우화집'이 출간된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고전 반열의 해외 문학작품들을 소개해 온 출판사가 이번에 '보편성을 견지하되 기존 권위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상상력의 다양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기준에 맞춰 '세계의 젊은 작가들' 시리즈를 기획했다. 신간은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다.

1957년생 이탈리아 작가 안드레아 데 카를로는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탈리아어 강사.트럭 운전사.정원사.카페의 기타 연주자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고 호주에서는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다.

활동영역도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고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배가 떠난다'를 조연출하는 등 영화작업에도 발을 들였다. 다양한 사회경험, 영화에 대한 관심 등 카를로의 활동반경은 미국의 인기 작가 폴 오스터와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소설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며칠간의 프랑스 여행을 틀림없이 떠날 것을 전화로 약속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높임말을 쓰긴 하지만 여행을 출발한 두사람이 남자의 지프 차량 안에서 나누는 대화의 분위기는 달콤한 밀회를 연상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은근하고 섬세하다. 남자가 옆자리의 여자를 의식해 다른 여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어색하게 받는 대목에서는 삼각관계의 조짐마저 엿보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녀는 부녀간임이 밝혀진다. 여행은 이혼해 따로 사는 아버지와 딸 간에 어렵사리 성사된 '부녀유친'의 기회였던 것이다. 부녀 관계임을 능청스럽게 속여 관심을 환기한 소설은 이후 특별한 사건이나 굴곡없는 밋밋한 여행 일정으로 채워진다.

서사를 대신해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열일곱살 딸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역사학자인 아버지 조반니가 오랜 경험과 성찰을 통해 체득한 깨달음을 전하는, 교리문답처럼 이어지는 부녀 간의 대화다.

조반니의 입을 빌려 저자가 건드리는 주제는 다양하다. 현대의 가정.인간의 진화.인간 개체의 성장.일상의 권태.남녀 관계의 변증법 등에 대한 저자의 거침없는 철학이 꼬리를 물고 제시된다.

가령 과거 가정의 의사 결정권은 극장 지배인이자 연출가.무대 감독.주연배우인 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얻어가진 어머니, 두사람에게 집중돼 있었고 자식들은 기껏 비중없는 조연이거나 강제 소집된 관중에 불과했다. 반면 현대의 가정에서는 그 관계가 역전돼 부모는 자식들의 어떤 요구라도 들어주는 부하이자 노예로 전락했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인간의 특성은 아량과 부드러움보다는 교활함과 기회주의다. 또 남녀관계에서 감탄.놀라움.재미 같은 연소성 감정이 사그라들고 나면 두사람의 차이는 어떤 둑으로도 막을 수 없는 위협적인 것이다.

잔잔하던 소설은 말미에 아버지가 딸의 남자친구를 비난해 불거진 둘 사이의 갈등으로 한차례 요동친다. 물론 갈등은 한시적이다. 서로에 대해 노골적인 분통을 터뜨린 후 부녀의 감정은 정화돼 유대는 회복되고, 갈등 이전보다 오히려 돈독해진다.

소설은 독자의 허를 찌르는 서사가 주는 짜릿한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부녀가 주고받는 대화, 그 안에 담긴 담론들은 시간을 들여 곱씹어봐야 할 만한 것들이다.

대화로 내용 대부분을 채운 파격은 신선하지만 자칫 소설의 긴장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관건은 독자의 무딘 통념에 충격을 가할 수 있는 메시지의 선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 일텐데,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잔잔한 재미를 전달하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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