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편지] 선생님 한분에 학생 40명 진정한 交感 언제 가능할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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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들어간 딸이 처음 치르는 중간고사. 날짜가 발표되고도 변함없이 느긋하게 지내는 딸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못 본 척 무심한 척 애쓰는 며칠이 흘러 어느새 중간고사를 하루 남겨놓은 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은 내내 덤덤했던 얼굴이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이다. "왜, 시험이 어렵게 나온다니?" 라는 물음에 절레절레. "시험 답을 OCR 카드 번호에다 칠해야 하는데, 그거 잘못 쓰면 큰일난대.

공부 열심히 해봤자 소용도 없대. 지난해 공부 잘하는 어떤 언니는 번호를 하나씩 넘겨 칠해서 빵점 맞았대. 답 번호 동그라미 칠할 때 사인펜이 조금이라도 삐져나와도 오답 처리가 된대. 수업 들어오시는 선생님들마다 계속 그런 얘기만 하셔. 큰일이야. 나도 실수하면 어쩌지!" 이런 시험을 쳐본 사람은 알지만 약간의 주의가 필요할 뿐, 겁먹을 일은 아니다.

생각 같아서는 어디서 당장 그런 카드 답안지를 구해 보여주고도 싶고, 선생님들이 강조해 말씀하시다보니 최악의 경우를 예로 든 거라고 얘기해주고도 싶지만, 끄덕끄덕 하릴없이 맹꽁이의 하소연을 듣기만 한다.

'말'에 대해서 만큼은 꽤나 민감한 편인 딸이 선생님 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 깍지도 뒤집지않고 고스란히 삼키는 데에는 모계 유전의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청소 검사를 잊고 퇴근하신 선생님을 기다리느라 어두워지는 교실을 혼자 지켰다던가, 하는 따위 '엄마 맹꽁이의 전설'을 딸이 알면 어떤 얼굴을 할까?).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보림)의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에는 옛 중국의 철학자 노자가 스승의 임종을 지키고 앉아 가르침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승- 내 입 속을 보거라. 혀가 있느냐? 이가 있느냐?/ 노자- 혀는 있고 이는 없습니다. 이빨처럼 딱딱하고 강한 것은 먼저 없어지고, 혀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는다는 말씀이군요.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평범한 교훈이다. 하지만 스승은 무엇보다 이것을 노자에게 강렬하게 기억시키고 싶었고, 그래서 죽음에 임박해서도 입을 벌려 혀를 보여주고 이를 보여주면서 깨닫게 했다는 얘기다.

이것 말고도 이 책에는 한시를 통해 우리 옛사람들이 생각과 심정, 사물과 풍경을 어떻게 강조해 말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그득히 실려 있다.

특히 저자의 단정하고도 다정한 글들이 안내하는 시의 세계는 우리에게 지루하고 상투적인 화법을 내던지고 참신하고도 뜨거운 교감을 꿈꾸게 한다. 줄이고 줄인 몇 마디 말로, 엉뚱한 단어 하나로, 토씨 하나로, 말없이 행간을 뛰어넘어… 사무치는 마음과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것!

선생님 한 분 대 40여명의 학생, 학생 한 명 대 11 과목의 선생님이 강렬한 교감을 나누기엔 우리 틴틴 교실의 수업 환경은 턱없이 산만할 것이다. 그러나 때는 봄, 예민한 기운으로 마음을 드높이면 삭막한 사각 교실에서도 멋진 시구 같은 대화가 공처럼 튀어오를 것이다.

이상희 <시인.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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