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선언의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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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34회 인권주간을 맞았다.
유엔이 1948년에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되새겨 본다. 그 선언은 국민과 국가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가를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수천만의 값진 인명을 풀잎의 이슬처럼 시들게 했다. 인간을 강압하는 권력과 그 권력이 저지른 전쟁의 참화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괴와 잔학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다는 것을 체험한 결과다.
인간은 욕망과 무지 때문에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문득 그 죄악의 잔해 속에서 허탈과 무의미를 깨닫기도 하는 존재이다.
그는 2차대전의 죄악 속에서 드디어 속죄의 교훈을 하나 얻고있다.
그것은 곧 인간권리에 대한 자각이며 인간존엄성회복에 대한 갈구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은 어디까지나 일반원칙이며 구속력을 갖는 국제조약은 아니다. 1976년 인권에 관한 국제조약인 국제인권협약이 발효되고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공동책임을 지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개인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보호,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조약이 일반화하면서 세계 각국은 다투어 이 협약에 가입하고 있고 또 그 조약들을 준수하고 있다.
국제인권협약은 주로 사회권을 규정하고있는 A협약과 자유권을 강조하는 B협약으로 구성된다.
각국은 물론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다르기는 하나 사회권을 점진적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점엔 일치하고 있다.
더우기 의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 있어서 자유권은 본질적인 만큼 그 실현은 회피할 수 없다.
B협약 중에는 인권 중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절대적 권리인 생명권을 규정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생명, 자유, 신체의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세계인권선언 제3조는 B협약 6조에서 부연되고 있다.
생명권은 사회가 부여하는 것이기 이전에 천부적인 것인 만큼 이것은 절대권이다.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호가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지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인권주간을 맞으면서 하나의 회의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아직 국제인권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인권수호의 국민의지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고 있다는 뜻인지 혹은 우리의 인권에 대한 자각이 미흡한 때문인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적지 않은 시련과 수난을 겪었지만 인권사의 측면에선 결코 후퇴했다고 보고싶지 않다. 더디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전진이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의 판례에서 보듯이 피의자에 대한 가혹행위는 공개적으로 규탄되고 강요에 의한 자백은 증거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그와 함께「임의동행」의 폐습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이나 헌법이 규정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철저히 준수되리라는 희망도 높아지고 있다.
물론 국민이 자신의 인권을 인식하고 스스로 방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법의 수임을 받은 행정·사법의 집행자들이 철저히 인권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적용하는 노력도 있어야겠다.
우리는 정부의 시정목표가 민주, 정의, 복지의 실현에 있으며 그것이 모두 궁극적으로 「인권」에 귀착됨을 안다.
더욱이 「인권」은 기본적으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의식이 깨어남으로써 가능하다는 전제아래 정부가 「의식개헌」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인권을 침해하는 사회적 부조리가 엄존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며 비리이다.
아직도 강요된 자백이 법원에 이르러서만 벗겨지며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무원의 위세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절대권인 개인의 생명권에서부터 표현의 자유, 근로의 자유에 이르는 폭넓은 자유의 확대는 지금 우리의 과제로서 제시되고있다.
인권주문은 그런 의미에서 국민의 인권에 대한 자각과 호응을 높이는데 좋은 계기를 마련해준다.
우리사회 모든 분야에서 인권존중의 실천이 보편화하기 위해 1차적으로 정부가 국제인권협약에 가입하는 일은 서두르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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