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의 엉뚱한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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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찍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생소한 낱말이 나오면 꼭 질문을 하곤 했던 여덟살짜리 딸애는 그 덕인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문자를 잘 쓰는 편이다.
며칠 전 아침엔 불쑥 『저는 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되어요』하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섬뜩한 감마저 들어서 쳐다보았더니 평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부모에게 다 털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을 갖고싶다거나 친구인 아무개가 부럽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 적마다 내가 언짢은 표정을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넋두리를 못한다는 뜻이리라.
아이들은 제멋대로 지껄이는 면이 있고 딸애는 특히 엉뜽한 면이 많아 당돌하고 어른스런 말을 곧잘하는 편이지만 그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딸애의 태도에 소심한 나는 왈칵 서운한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뿐인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아주 비정하고 무지한 엄마란 말인가. 내가 각성해야될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옛말에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있구나 하며 조금은 딸을 원망하다말고 문득 가슴속이 뜨끔해짐을 의식했다. 나도 언젠가 딸애처럼 무심하게 친정어머니께 한마디를 해서 어머니의 가슴을 한스럽게 만든 일이 떠올라서다.
어느 날 아버지를 원망하는 어머니께 『어머니는 똑똑하시면서 왜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뺏겼어요』하고 쏘아붙였던 일이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내 뺨을 치시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노기충천해 하셨던 모습은 여태껏 뵐 수가 없을 만큼이었다. 어머니와 같이 늙어가는 맏딸로서 위로해 드리진 못할망정 속없이 그런 말을 하였다는 사실이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럽고 어머니께 죄스런 마음 한량없다.
자식에게서 불측한 말을 듣는 부모의 심경이 과연 어떠한가를 비로소 실감이 되는 느낌이다. 앞으로 딸애는 얼마나 나의 가슴에 재를 뿌리는 말을 하며 성장해 갈 것인지 모르지만 자식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그런 얄팍한 모정이 되어서는 안되리라.
그나저나 딸애도 어렴풋이나마 행·불행을 자각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앞으로는 딸애를 나의 부속물이 아닌 한 독립된 인간으로 생각해야 될 것 같다.<서울은평구녹번동90의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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