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기가 꺾인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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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벼가 익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도 저 여름 들판처럼 푸르고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꾼다. 그러나 요즘 불안하다. 푸른 들판이 누렇게 병들어 가을 추수를 망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에서 나온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의 정신이 건강하고 기상이 있으면 그 나라는 번성한다. 잘못된 생각들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면 그 나라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국가에도 '정신의 힘'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오늘의 우리를 만든 것도 '정신의 힘' 때문이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견디며 무엇인가 이루어 보겠다는 정신이 1945년 신생국들 가운데 우리를 으뜸의 나라로 만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정신이 퇴색하기 시작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아널드 토인비가 문명은 타살되는 것이 아니라 자살한다고 했듯이 한국은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해 애를 쓰는 나라처럼 보인다. 북한이 남침하여 우리가 망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스스로 무장 해제를 하고 무기력하게 병들어 가고 있다.

정부 대표로 북한에 간 사람이 김정일을 못 만나 안달하다가 만나 주니 은덕을 입은 듯 감지덕지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우리 국민이 뭐가 못나서 남쪽 대표가 그런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주는 쪽은 우리인데도 말이다. 국민의 자존심은 생각하지 않나. 지금의 집권세력이 나라 경제에 무슨 기여를 했다고 자기가 번 돈인 양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눈을 부라린다. 자기들만 동포애가 끓는 듯이 행동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동포애를 외치는 사람들이 왜 남쪽 동포에 대해서는 수구보수니, 기득권이니 하며 그렇게 못살게 구는지…. 북쪽 대표들이 내려왔을 때 단하에서는 '김정일 장군 만세'소리가 나오고 단상에서 북쪽 대표가 '북남 노동자가 함께 미군을 몰아내자'고 한다. 이곳이 평양인가, 서울인가. 북쪽 지지하는 사람은 가슴 펴고 활보하고, 남쪽에 애착이 있는 사람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숨어서 소곤거릴 뿐이다. 경찰은 대한민국 현행법 위반자들을 보호해 주려고 비상이 걸렸고, 남쪽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과거 독재정권 때와 똑같이 미행하고 감시했다. 남북 협력이니 공존이니 말하지만 솔직히 이미 남쪽은 북에 대해 기가 꺾였다. 이게 건강한 나라인가.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대통령조차 가장 큰 문제라고 인정했다. 중산층은 줄어들고 상하계층만 늘어난다는 얘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산층에서 하층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회구조가 병들고 있는 것이다. 월급이 많든 적든 직장이 있으면 그런대로 중산층의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직장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사업이 잘 되면 부자가 생겨난다. 그런데 그 부자를 미워하는데 누가 기업을 하려고 하겠는가. 배가 고프면 열심히 농사를 짓자고 말해야 할 텐데, 지금은 동네 부잣집 담 너머로 돌을 던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돌을 던진다고 배고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혹시 부잣집 광을 털어 배를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으로 끝이다. 근면 정신은 매도하고 시기심과 미움만 부추긴다. 이게 병든 나라 아닌가.

과거 문제만 해도 그렇다. 건전한 사람은 과거에 매이지 않는다. 현재를 감사하게 여기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다면 어려웠던 과거도 아름다운 법이다. 마음이 병든 사람은 과거를 곱씹으며 세월을 보낸다. 남의 탓만 하며 시간을 죽인다. 지금 이 나라가 온통 과거로 뒤덮여 있다. 지도자는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과거 문제다. 불행했던 과거만 들추는 나라가 건강한 정신을 가진 나라인가.

정치는 그 나라 문화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권위주의 문화 아래서 권위주의 정부가 생겨난다. 그러나 정치가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권력이 만들어 내고 있는 문화 속으로 끌려가고 있다. 그 문화는 당당함보다는 유약함을, 다른 사람의 성취를 인정하기보다는 미워하기를, 미래보다는 과거에 매달려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나라 정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입하고 있다. 보통사람들은 "이게 아닌데…"라고 느끼면서도 그 문화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 왜? 그들이 정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라는 제도를 다시 생각케 한다.

문창극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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