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조] 꽃말 - 김동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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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그래, 어쩌자는 것인가.

산길을 걷는 시인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한데, 해는 발그레 산노을을 자아낸다. 그런 해거름의 길섶, 기다림의 목이 막무가내 길어지는 것을 어쩌자는 것인가.

김동인의 ‘꽃말’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문답 같다. 이른바 ‘그리지 않고 그린’ 문인화 한 폭처럼. 전혀 관능적 어휘나 표현이 없음에도 시인이 행간에 숨겨둔 낱말을 헤집게 만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부끄러운 듯 산골짜기 습지에 숨어 홍자색으로 피어나는 꽃을 보며, 화자는 곁에 없는 사랑을 생각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물봉선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이들의 모습이 저러할까. 물봉선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Don’t touch me)’이다. 화자의 마음 자락에 피어 가녀린 몸으로 하루를 견딘 물봉선의 모습은 흡사 종일토록 화자를 기다려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하다. 첫수는 봉선화의 입장, 둘째 수는 화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안타깝기만 하다.

김동인 시인의 여러 시편 중에서 ‘꽃말’을 선정한 것은 남도의 치렁치렁한 서정의 가락을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빚어냈기 때문이다. 김동인 시인은 2000년대 등단한 시인 중에서도 개성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다. 이렇게 젊고 패기 있는 시인의 등장은 시조의 미래에 대한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오승철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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